모호한 목적의식, 지나친 낙관론
이제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인가? 과단성을 갖춘 리더라고 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에서 이렇게 호평한다. 그래서 일각에선 ‘동맹’을 운위한다. 노 대통령이 이들과 삼각동맹을 형성했다고 한다. 너무 섣부르다.
어차피 오래 갈 관계가 아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정부가 개헌안을 발의한다. 이때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물을 필요조차 없다. 성의 표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한미FTA 협상을 진두지휘한 노 대통령에 대한, 손 안 대고 코 풀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해하면 족하다. 기껏해야 ‘시한부 제휴’에 불과하다.
‘파괴 전문가’ 노무현
엄밀히 보면 노 대통령은 ‘파괴 전문가’에 가깝다. 기존 질서와 고정 관념을 일거에 허물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존 질서와 고정 관념 허물기를 일거에, 충격요법을 통해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마지막 승부수를 과감히 던져 대통령이 된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연정 제안과 한미FTA 협상이 단적인 예다. 대연정 제안은 기존의 정치질서를 일거에 허물려 한 시도다. 지역구도에 터 잡고 극심한 정쟁에 의존한 비생산적 정치질서를 허물려 했다고 노 대통령 스스로 주장한 바 있다.
한미FTA는 경제 질서를 뒤바꾸려는 시도다. 최소 범위에서 유지돼온 도농간 직종간 계층간 공존구도를 ‘월등’과 ‘낙후’의 틀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과정도 비슷하다. ‘전격성’을 특징으로 한다. ‘한방’에 의존한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게 아니라 아예 돌다리를 뛰어넘으려 한다. 그래서 ‘밑으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 이루려 한다.
속도를 조절하자. 자칫하다간 ‘부실’이나 ‘날림’과 같은 일방적 평가가 나올 수 있다. 노 대통령에겐 나름대로 곡절이 있다. ‘설거지 정부’라는 한계가 그것이다. 3김정치, 즉 지역구도에 기반한 정쟁구도를 청소해야 했다. 환란 후유증, 더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정부가 펼친 ‘단기 처방’의 부산물을 설거지해야 했다. 다른 방향이 없었다. 기존 여야구도를 뛰어넘어야 했다. 어차피 대세가 된 개방 기조에서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 대통령을 뒷받침해야 하는 여당의 다수는 3김정치 폐막 이후, 즉 17대 국회 들어 원내에 진입한 세력이었지만 그에 비례해서 정치력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당의 고참 국회의원들은 3김정치의 정치행태에 길들여 있었다. 이들을 지원군 삼아 지구전을 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진공전을 펼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이었다.
문제의식은 ‘뚜렷’하나 목적의식은 ‘모호’
‘왜?’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대연정을 하더라도 왜 그 대상이 한나라당이었냐는 질문이 나온다.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당과의 연정은 3김정치로의 복원이다. 민주노동당과의 연정은 또 하나의 전략과제인 개방기조에 배치된다. FTA를 하더라도 왜 그 대상이 미국이었냐는 질문도 나온다. 이 이유 역시 분명하다. 중국과 FTA를 먼저 체결하는 순간 경제문제가 정치문제가 된다. 한미동맹을 버리고 친중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정치공세에 시달린다. 그러면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소도 잃고 외양간도 잃는 곤경에 처한다.
노 대통령에겐 분명 곡절이 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치는 건 과하다. 그렇다고 마냥 껴안을 필요도 없다. 노 대통령이 간과한 게 있다. 한나라당의 수구성을 간과했다. 3김정치의 유물만 중시했지 냉전․개발시대의 유물이 병존한다는 사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개방이 배척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소홀히 한다. 아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개방이 사회적 약자를 궁지로 내몰고, 새로운 사회적 약자를 양산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오히려 한미FTA가 우리 경제의 파이를 키워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반발 자초할 수밖에 없는 노무현의 숙명
노 대통령을 ‘파괴 전문가’로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의식은 뚜렷하지만 목적의식은 모호하다. 현재에 대해선 전투적이지만 미래에 대해선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대연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3당 합당과의 차별성을 설명하지 않는 게 그 반증이다. 농가 피해대책을 내놓겠노라고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후 백 수십조를 쏟아 붓고도 농촌 살리기에 실패한 전례를 극복할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 게 그 사례다.
그래서 즉자적인 반발을 야기한다. 설득이 아니라 반발을 자초하고 토론이 아니라 전투를 유발한다. 어찌 보면 숙명적이다. 노무현 정부는 중간정부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역사적으로 과도기에 위치한 정부라는 점에서 그렇다. 상황 인식과 처방 수준이 중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마이뉴스/ 김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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