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종교와 정치, 시대에 따른 종교인의 임무

녹색세상 2007. 3. 26. 14:08

   얼마 전 세명대 석좌교수인 김용옥씨의 주장이 언론에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논조였다. “기독교인은 정치에서 손을 떼라.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나라, 신정 정치로 가려는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종교는 국운을 리드하려고 하기보다 양보와 겸양의 자세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


  물질세계를 어느 정도 달관한 종교인이 정치를 통하여 권력을 추구한다면 그것 또한 세속적인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그것은 종교적 활동이라 부르기 민망한 행위일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볼 때 김용옥씨의 주장은 일단 타당한 견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인이라 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믿고 그에 따른 신념으로써 행동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현실 초월적이기 때문에 종교인은 현실적인 문제와 결별하여 살아야 할 것인지가 문제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일단 정치적 사안으로 국한하려고 한다. 정치는 그 근본이 권력을 추구하는 활동이며 또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여 주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세속적 종교인의 세속적 역할... “종교와 정치, 시대에 따른 종교인의 임무”


  그러면 독일 히틀러 치하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보여준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과 신념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가 루터교 목사라는 이유 하나로 그의 정치적 활동이 비난받아야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종교와 정치 사이에 관계설정을 할 이유가 생기게 된다. 또 이를 바탕으로 이 시대의 종교인이라면, 또 한국 땅의 기독교인이라면 정치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은가를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사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던 정치와의 불륜적인 결탁을 관찰하면 종교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더욱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히틀러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독일의 교회와 일제치하 신사참배 때 보여주었던 한국 교회의 변절, 더구나 기독교는 군부 독재시절 대표적인 장식적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유신헌법에까지 축복을 하였으며, 5공 때 기독교가 보여준 권력에 대한 비굴한 태도(그 예로 조찬기도회) 등은 권력의 정당성을 불문하고 기독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져왔거나 당시의 정권을 정당화해주는 도구로써 존재하여 왔다.


  비세속적이어야 할 교회와 세속적인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일단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렇다면 종교인들은 항상 시대상황과 정치에 관하여 초연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시대가 지금과 같은 평시가 아니라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종교인들은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들이 이에 뒤따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디트리히 본회퍼는 20세기 초반을 살다 간 독일의 루터교 목사로서 또한 교회를 통한 유명한 투쟁가로서 종교인의 정치활동을 적극 주장하고 나선다.


“첫째, 교회는 국가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국가의 행위가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는가? 교회는 오늘날 유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 질문을 분명하게 제기해야만 한다.
둘째, 교회는 모든 사회질서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빚을 지고 있다. 설령 그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셋째, 교회는 국가가 과다하게 법을 집행하는지 감시하여 바퀴에 짓밟힌 희생자를 싸매어 줄 뿐 아니라 바퀴 자체를 저지해야 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게슈타포에게 잡혀가던 시절 독일 본토에서 일개 목사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정치적이다. 마치 사립학교법 개정반대 투쟁을 위해 머리를 박박 깎아버린 여러 목사들의 결연한 표정에서처럼 선동적인 논조의 주장이다. 그러나 두 정치적 활동의 본질이 다름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박박 머리를 깎은 헤어스타일의 목사들의 강력한 주장에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그리스도의 사상에 대한 전제는 생략되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사학법 개정은 이 땅의 수많은 기독교 사학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고 (사실 심각한 침해가 결코 아님에도)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태도 외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주장들도 자신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치적인 활동이라 규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본회퍼가 보여주는 정치적인 종교인은 보다 본질적인 비판을 수반한다. 교회가 손해를 입더라도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 갈 때 그리스도처럼 곧은 소리를 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삭발한 목사들이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교회가 피해를 보기 싫어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행동과 본회퍼가 보여주는 나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치적 투쟁은 완전히 다른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정치 투쟁가인 본회퍼 목사는 동네 교회의 일반적인 목사의 표정을 떠올린다면 잘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인으로서 그의 활동은 급진적이며 과격하다.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섰을 때 재판장이 “당신이 목사로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고 심문하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가 트럭을 몰고 대로를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면, 목사로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 사용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한 그의 주장과 신념은 목회자의 신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또 친구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제부터 나는 히틀러와 바르트의 대화를 가망 없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동의 하지 않기로 했네. 히틀러는 자신이 냉혹하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강요할 것이네. 히틀러를 전향시키겠다는 프랑크 부흐만의 옥스퍼드 운동은 너무 순진한 시도였네”에서 본회퍼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강경노선과 교회투쟁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본회퍼 목사는 단순히 시대 상황에 비판적인 용장(勇將) 스타일의 목사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학계에 오래있지 못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리라”라고 말한 점을 볼 때, 그는 이런 지적인 탐구 열정을 중시하였고 따라서 그는 목회자라기보다는 신학자에 가까워 보인다. 또 그가 체계적인 신학적 저술활동을 한 적이 없음에도 (단지 옥중 저작이나 편지들에게서 나타나는) 그의 신학적 사상은 20세기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의 신학이 그토록 호평을 받는 이유는 성경 속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생생한 생활 속에서 다시 부활시키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의 가르침대로 행동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단지 하나님을 승인하거나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교적인 윤리를 인간의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본회퍼는 관념적인 종교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는 종교, 실천하는 종교를 추구하고 있다.


  본회퍼가 생각했던 진짜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인류의 죄를 사하여주고 하늘 높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그리스도 상(像)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루터교의 기초 위에 미국교회의 평화주의 사상의 영향 등을 받은 그의 배경은 나치 정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회는 사실을 인식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전능한 말씀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전혀 다른 말 곧 인간적인 말, 무력한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늘 참된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된 계명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이 같은 주장에서는 생생하게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신(神)으로서의 존재와 진리에 대한 가치 상대적 사상이 엿보인다. 영원불변의 진리를 강조하는 목사님들에게는 큰일이 날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신(神)이 구약시대에만 의미가 있는 신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겐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인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은 그가 속해있던 비정상적 정치상황(나치가 인종차별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정황)에서 종교가 평상시에 수행하는 양보와 겸양의 자세가 이제는 먹히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배가 안전하게 항해 중일 때 구명조끼의 역할과 침몰할 때 구명조끼의 역할이 결코 같을 수 없듯이 평상시 소외된 이웃을 넉넉히 품어주고 죄인에 대한 정죄보다는 용서를 베푸는 종교의 역할과 전국이 독재자에 휘말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돌아가는 비상시에 현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잘못된 정치 상황에 대한 투쟁은 종교인이 수행하여야 하는 이중적 역할일 것이다. 물론 앞서 지적한 대로 이러한 정치투쟁은 교회의 이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종교의 순교자적 태도를 의미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 통합을 위한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가이다. 본회퍼 목사가 가입된 에큐메니컬 협의회의 일원인 세계동맹은 그 계명을 전 세계에게 전한다.

 

  “우리의 신학적 과제는 그 계명을 구속력 있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미해결 과제로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평화를 외쳐야 전 세계가 알아들을까요? 누가 평화를 부르짖어야 모든 민족이 그 소리를 듣고 기뻐할까요? 그리스도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위대한 에큐메니컬 공의회만이 평화를 외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전 세계가 평화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고, 모든 민족이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전쟁을 금하며 광포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세계가 무장을 한 채 뻣뻣하게 굳어 있습니다. 전쟁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내일 울려 퍼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 역사상 유례없는 공범이 되시렵니까?”


  에큐메니컬 운동가들이 주장하다시피 전 세계를 아우르는 통합 종교가 존재한다면 (작게는 전 교파를 초월한 통합된 크리스트교가 존재한다면) 신(神)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분쟁 사이에서 훌륭한 중재자가 될 수 있다. 같은 기독교권 국가들인 유럽에서 수 없는 종교전쟁과 분쟁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종교 통합운동은 당장 사회에서는 별 쓸모없는 주장일지는 모르나 세계대전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은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끊임없이 고민한 부분은 "기독교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는 종교 없는 사람들의 주님도 되실까? 종교 없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종교가 기독교의 의복에 지나지 않고 그 의복도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종교라는 옷을 벗어 던진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편지 대목에서 ‘비종교적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다.


  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본회퍼는 “나는 천성이 종교적이지 않네. 하지만 나는 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네. 내게는 참됨, 삶, 자유, 자비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네. 나는 종교적 겉치레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네”에서와 같이 그는 종교적 형식주의가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주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십일조를 헌납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요예배나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는 등의 종교적 형식을 완전히 벗겨 버릴 때 그 기독교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본회퍼가 그러한 질문에 계속 시달린 점으로 미루어 그는 형식적 종교인보다는 실질적 종교인을 지향하였다고 보인다. 교회에 갇혀서 무기력하게 예배당에 앉아있는 소극적인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체화(體化)한 살아 움직이며 적극적인 (전투적인) 그리스도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런 일련의 사고의 시퀀스를 통하여 그가 적그리스도와 같은 나치 정권에 대하여 비판의 칼날을 세운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본회퍼의 삶과 사상을 통하여 본 종교인의 정치적 역할과 지금 한국에서 출현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인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정리를 하자면 종교인의 자기희생적 정치활동과 자기중심적 정치활동의 차이를 들 수 있고, 평상시의 종교인의 정치에 대한 관조의 자세와 비상시의 정치에 대한 급진적 역할 따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의 집단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기독교인으로 세태에 편승하여 권익을 확보하거나 기독교를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이비 종교인의 등장과 이미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이 된 기독교를 정치권력을 위하여 수단화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 분들은 어마어마한 신학적 업적을 쌓았든 평생을 목회 활동을 했든 뭐든 상관없이 본회퍼가 고민한 기초 개념부터 다시 잡고 오셔야 할 것 같다. (오마이블로그/지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