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은사님들과 통화를 하면서.....

녹색세상 2007. 2. 21. 21:29

  명절도 지나고 해서 은사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찾아뵙지는 못하고 가끔 전화로만 몇 마디 하는 게 여간 송구스럽지 않다. 넉넉한 형편이 못 되는 집에서 자란지라 부모님들이 학교에 한 번 못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어린 중학생이 당돌하게 말해도 받아 주곤 하셨던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 정도로 사람 구실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시절의 내 모습이 어떤지 궁금해 여쭈어 봤더니 중3때 담임을 하신 은사님은 “자네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는데 어른이 반듯하셔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건의사항’을 잘 말하기고 했다는 말씀도 하시고. 중2 담임을 하신 은사님은 “범생이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문제가 있는 것은 지적한 고집이 학생이었다”고 하시고. 담임은 안 했지만 큰 형님 같았던 은사님은 “당시 교사와 학생들이 거리가 멀던 시절인데 보면 피하지 않고 먼저 인사를 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할 말은 했던 걸로 생각 된다”고 하셨다.


  어린 게 뭘 알았겠는가만 불편한 말을 해도 들어주셨던 분들이 있었기에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그 때 배웠고, 회의진행법도 중학교 때 배워 살아가면서 살을 조금씩 붙여 지금까지 잘 써 먹고 있다. 대구시내의 유일한 남녀공학 학교라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고 교복을 수시로 다리미질해서 입고 다녔다. 그 때 깔끔을 떨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다.


  교육여건이 좋던 중학교와는 달리 신설학교인 고등학교는 제대로 적응을 못해 마음고생을 했는데 “사회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려면 독어를 해야 한다”며 방황하던 나를 잡아 주신 은사님이 계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점수도 별로 안 좋은 녀석이 문제제기를 수시로 하는 바람에 찍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전화를 해도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 된다. 아버지 같은 고마운 분인데.....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사람구실 못하며 살아 고개를 들 수 없다. 이런 엉터리 제자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한다고 하자 “사회가 발전 하려면 좌파도 있어야 한다”며 격려해 주신 선생님, “사회 교사로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다”고 하셔 큰 힘이 된다. 다까끼 마사오가 철권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제자들을 제대로 못 가르치긴 했지만 그 시절에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이라 세상 돌아가는 것은 다 알고 계시는 것 같다. 해방 전후 사건과 한국내전에 얽힌 사연이 많은 세대니 가슴에 맺힌 것도 많으실 테고. “자네 어려운 일 한다”며 위로 해 주는 어머니 같은 은사님도 계시니 살아갈 맛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복은 있는 것 같아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