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자전거로 쌀 배달 하던 어린 시절

녹색세상 2007. 2. 18. 16:39

  설이 되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서구위원회 장태수 당원이 쓴 책 중에 중학교 시절 상동 밭에서 채소를 잔뜩 실고 성당시장까지 갔다는 글처럼 우리 형제도 비슷한 시절을 보냈다. 장태수 당원이나 우리 형제나 얼굴 보면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온실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티가 줄줄 흐른다는 말을 듣는다. 장태수의 집이 안지랑 시장 부근이라기에 땅 좀 있는 부자집 아들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늘 웃는 얼굴의 그 후배나 우리 형제 얼굴에 고생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장사 십년 넘게 하면 사람 볼 줄 안다는데 단골 대포집의 주인들이 건설현장에서 돌아다닌 지 얼마인데 ‘노가다티’는 전혀 안 나고 백면서생이라고 보는지 모르겠다. 그런 얘기만 듣는 게 아니라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으로 보기도 한다.


  청년시절 전교조 교사들이 해직될 무렵인데 본가 근처에 가끔 가는 다방이 있었다. 주인이 인정 많은 아주머니였는데 ‘노가다 한다’고 말하니 ‘전혀 아니라’고 했다. 정말 건설현장에 돌아다닌다고 해도 ‘교직에 있는 사람 같다’며 최근에 해직되어 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여러 장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었는데 ‘물 장사 십년이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며 나 보고 거짓말 하지 마라니 더 우길 수도 없었다. 부근에 있는 맥주집에서 한잔 하자고 부르면 와서 이런 저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삶의 애환을 쏟아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한잔 사면 다음에 그 아주머니가 한잔 사곤 했다. 장사 오래한 사람치고 때 묻지 않은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기억난다.


  어릴 때 우리집은 쌀가게를 했다. 물론 연탄도 같이 했다. 살기 힘든 시절 쌀 한말 정도 사면 당분간 끼니 걱정은 안 했으니 배달을 바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골도 안 빼앗기니까. 아버지가 어디 가고 안계시면 배달은 내 몫이었다. 중3이 되고 부터는 쌀 한가마 배달도 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많이 넘어졌지만 몇 번 해보니 익숙해져 자연스레 할 수 있었다. 집에 쌀이 떨어지면 도매상으로 가서 몇 가마를 실고 오기도 했다. 평지를 달리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내려올 때 잘못하면 그대로 쳐 박는데 넘어진 적도 많다.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던 동네라 연탄을 마루 밑이나 한 쪽 구석에 집어넣어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리어카에 가득 실으면 100장인데 골목에 들어가려면 혼자 갈 수 없어 동생이 밀곤 했다. 한 여름 연탄 집어 넣고 나면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그 덕분에 우리 사남매가 먹고 살고 공부했건만 왜 그리 하기 싫던지..... 살기 힘들어 자식 공부를 못 시키는 집이 많았는데 우리 형제는 부모 잘 만난 덕에 대학 구경할 수 있었다. 집안 일 거드는 바람에 졸지에 ‘효자’라는 소리도 듣고. 같은 동네에 산 선배들은 내가 출세해 잘 나가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하기야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하나 뿐인 인간이 세상을 바꾸려 설쳤으니 출세를 한 셈이다. 심 탁 신부의 말처럼 ‘세상의 교사’라 자위해도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