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처음과 마지막

녹색세상 2007. 1. 28. 00:48

  

   ‘꿀보다 단 하나님 말씀’이라며 성서를 극찬하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제가 신앙생활 30년 했지만 솔직히 재미없는 책임에 분명합니다.(번역에 문제가 있어 주로 공동번역을 봅니다.) 어쩌다 솔로몬이 쓴 지혜의 글이나, 노년에 인생 황혼 길에 접어들어 기록한 전도서를 보면 저도 모르게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쓴맛 단맛 다 경험한 사람의 삶의 연륜이 베어 나옴을 느낄 수 있더군요.


  예수의 직계 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의 절반을 기록한 뛰어난 이론가이자 철저한 활동가였던 바울이 불치의 병에 걸려 늘 고생을 했는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 고생하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고질병 고쳐 달라고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지금 네가 갖고 있는 은혜에 만족하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역시 내공이 쌓인 사람답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 운동에 자신을 던집니다. 시련을 겪으며 배운 게 있다면 참된 고백이란 어려움 가운데 나오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이 주는 교훈은?


  성서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씩 고르라고 한다면 구약성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기’일 것이며, 신약성서는 ‘예수부활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학정 밑에서 온갖 고생을 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집단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하나님인 ‘야훼’가 일러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간다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편함과 안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아 모험하는 것도 자신의 발전을 위한 현대판 ‘출애굽’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지도부는 인구 조사를 합니다. 여자와 어린이는 사람 축에 안 끼워준 시절인데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 과장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장정만 60만이라면 남녀노소를 다 합하면 족히 300만은 넘을 것인데 당시 중동지역 인구를 다 합친다 해도 안 되니 수천 명이나 만여 명 가량 되지 않을까 하는 게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철저하게 훈련되어 조직이 갖추어진 군대가 아닌 엉성하기 그지없는 유랑민 대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는 그 중에 정예병들을 뽑아 정찰을 보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 같이 ‘가나안 사람들은 거인들’이라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찬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니 당장 밀고 들어가자”며 희망과 확신이 가득한 보고를 합니다. 너무나 상반된 보고에 지도부도 고심을 하고, 도망자 처지인 히브리인들은 ‘그래도 이집트에서는 굶어 죽지는 않았다’며 원망을 하며 지난 시절 노예근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일제 패망 후 질서가 잡히지 않고 식량 배급이 원활하지 않자 ‘일제시절이 낫다’고 하던 모습과 너무 흡사하죠.


  대중들이 ‘안 된다’고 난리를 치니 지도부인들 어떻게 할 수 없어 지도에 보면 단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40년을 사막에서 헤매다 다 죽고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입성의 영광을 누립니다. 유목민들이 농경사회를 형성해 살고 있던 지역을 쳐 들어간 것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 논란이 분분하지만 가나안 입성의 영광은 두 사람만 누렸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사 이집트 탈출기가 사실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사건에서 ‘확신과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라는 교훈만 얻을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요 생명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우리네 삶이 신화의 연속이고, 우리가 그 신화의 주인공’이라며 희망을 강조합니다. “혼자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고도 했죠.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신약성서의 핵심은 두말 할 것 없이 부활 사건입니다. 팔레스틴 시골구석에서 로마의 식민지로 신음하던 동족들에게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 예수는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에 대항하던 정치범들이 받는 형벌입니다. 정확히 말해 예수는 로마에 대항한 정치범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로마를 엎어 버리지 않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이 기록한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추측하건대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영원한 진행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비신화화,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말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은 실존적 고백”이라며 부활 사건을 역사적인 것으로만 몰아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물론 불트만은 ‘성서는 일점일획도 더 하거나 빼면 안 된다’고 우기는 무식한 인간들로부터 ‘이단’이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 역시 부활 사건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체화되어 새로이 고백하고 재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설하고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기성 교회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과 축복만 말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해 사기에 불과합니다. 남한 최초의 의문사 사건인 장준하 선생, 이승만 독재 정권 시절 온갖 폭력을 휘두르던 정치 깡패들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데 죽일 재주가 없죠. 그러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을 불태운 전태일 열사. 그의 정신은 수 많은 노동자들의 가슴에 ‘노동해방’의 새로운 씨앗이 되어  자라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를 했다는 말을 듣는 늦몸 문익환, 비록 그는 죽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 몸이 그대로 공중에 들려 올라간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논리와 사고를 주입시키면서 ‘무조건 믿어라’고 지금도 강요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역사적인 것으로만 묶어 놓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 맞는 것으로 재해석할 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텐데..... 입만 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서’라는 곳에 가두어 두고 자기 입에 맞게 끼워 맞추면서 ‘믿음’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 한다’는 철학의 기본 명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고 신앙의 출발은 ‘변화’에서 시작하는데 ‘그대로’를 강요하고 있으니 정말 웃기는 노릇이죠.


  한미FTA란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비정규직 악법이 국회를 통과하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면서 참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들먹이며 ‘축복장사’를 하는 것은 사기요 하나님에 대한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 땅의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은 분명 ‘민중의 아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