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박정희 통치 18년의 교훈

녹색세상 2007. 1. 16. 20:49
   대선을 앞두고 망령이 되살아난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는 실국시대에 각종 소작쟁의에 개입하며 민족해방 운동에 적극 참여한 형과 정반대로 혈서까지 쓰며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 특무대에 체포되자 동지들을 배신하고 조직명단을 털어놓는 조건으로 일본 육사출신들의 구명 운동 덕에 살아남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이승만 정권을 보며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사회가 혼란했던 자유당 말기에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매불망 때를 기다리던 박정희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의 혼란기를 틈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다. 임무가 끝나면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약속만 지켰어도 516쿠데타도 혁명으로 인정을 받고 박정희 역시 혁명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대통령에 올라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재산을 모으고 인권을 탄압하는 등 아세아에서 손꼽히는 독재자가 된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문화방송(MBC)을 빼앗는 것으로 권력형 부정축재 첫 번째 테이프를 끊는다. 이어 평생집권을 위한 3선 개헌과 유신을 통해 사전에도 없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국회의원 1/3을 자신이 뽑는 희대의 사기극인 '한국적 민주주의'는 입법, 사법, 행정을 박정희가 장악함으로써 우리의 정치문화를 30년 이상 퇴보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인권을 여지없이 짓밟아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세상을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11위의 경제대국이 된 데에는 청빈하게 살았던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켜놓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경제발전의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대통령 친인척들의 비리도 없었다는 대목에서는 입이 벌어질 뿐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청와대를 접수하던 61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내놓을만한 경력도 없는 큰 사위 한병기는 뉴욕총영사관에 이어 건설공제조합 이사장, 선주협회 회장 설악산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또한 조카 박재홍은 28살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을 거쳐 32살에는 동양철관 회장이 되어 잘 먹고 잘 사는 기틀을 마련하고, 민정당, 민자당, 자민련, 한나라당을 거치면서 국회의원 배지를 네 번이나 달았다. 또 다른 조카인 박준홍(김종필 처남)은 항일 독립운동을 하고 시월항쟁에 적극 참여해 처형당한 아버지 박상희를 버린 대신에 숙부에게 빌붙어 불과 31세의 나이에 정무조정실장(관리관)이 되더니 32살에는 장관과 맞먹는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질서인 장덕진도 축구협회 회장을 거쳐 장관을 지냈는데 왕조 시대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학교 교사였던 박근혜의 외숙 육인수는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을 지냈고,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과,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 일신산업 회장에 취임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많은 국민이 박정희를 하늘처럼 모시는 데는, 짝퉁 언론들의 장벽에 가려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탓도 클 것이다. 전 경제 부총리 정인용 씨는 회고록에 "한국은 65년부터 97년까지 IMF에서 총 17회의 구제 금융을 받았고 오일쇼크 당시에는 모라토리움(국가부도)까지 당했다"라고 적고 있다.(2001년 4월 25일자 중앙일보)


  건국 60년의 1/3에 가까운 박정희 통치 18년이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끼친 해악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표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예로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김종필 등을 꼽겠는데, 그들이 조 단위의 부정축재를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정경유착은 훗날 외환위기의 원흉이 되었음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자 김종필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887억원의 거액을 환수조치 당했는데 지금 가치로는 계산이 불가능한 액수이다. 거액을 환수당하고도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것은 박정희 정신만은 아직도 펄펄하게 살아있다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백억대에 이르는 이후락과 박지만, 박근영, 박근혜가 재산을 축적하며 살아온 과정을 보면 평생 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는 천하가 자신의 것이었으니 축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탈한 영남대학교에 박근혜가 재입성 하려다 학교구성원들의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연필장사를 하던 조카 박재석은 작은아버지인 박정희 덕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고, 또 다른 조카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 동양육운 회장이 되는 등 친인척들의 정, 재계 진출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주변 인물과 친인척들의 공개된 부정축재 액수만 해도 천문학적인데도 청렴했고,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고 우기는 한나라당과 박근혜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한다.


  순진한 국민은 박정희와 그 수하들이 뿌려놓은 빚더미를 외환위기와 함께 떠안아야했고 지금도 고통의 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에게 악수를 하려고 달려드는 시장아머니들과 젊은이들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다면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5.16쿠데타'를 '5.16혁명'으로, '4.19혁명'을 '4.19학생운동'으로 표시하는가 하면 왜놈들에게 쌀을 수탈당한 것을 수출로 묘사하고, 대량으로 수출한 지주와 농민은 큰 수익을 올렸다고 적은 교과서가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무거운 집을 지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7천만 민족을 대표할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일부 후보들이 검은 선글라스까지 써가며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걸 보면 나라의 앞날이 암담할 따름이다. 쓰라린 역사를 외면하고 친일파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이승만이 부정부패로 파국을 맞았다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는 인권유린과 황금만능주의, 정경유착 등이 더해진 부정부패의 완결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통치 18년은 인권과 자유, 정의가 실종되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불확실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짝퉁 언론과 어용 지식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역사의 정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 지극히 혼란스럽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다. 80년대 초반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학살자 전두환을 지키며 청춘을 썪힐 때 같은 부대에 있었던 박지만은 중위임에도 외제승용차를 굴리고 있었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인데 외제승용차를 무슨 재주로 몰고 다니는가? 부모들이 도둑질 해 놓은 돈이 없이 가능했겠는가? 손가락 끝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땀 흘려 일하지 않은 박근혜가 지금의 부를 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변부터 해야한다. 정말 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박근혜는 그만 설치고 자기 아버지와 친인척이 역사 앞에 저지른 엄청난 죄악부터 사죄해야한다. 오호 통재라!! (오마이뉴스 독자 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