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대통령의 ‘막말’과 ‘신성한 병역 의무

녹색세상 2007. 1. 1. 20:37

   군대에서 '썩는다'는 대통령의 '막말'에 대해 똥별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최고 권력자가 점잖고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비판이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많이 나온 터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라 밖으로는 국민을 대표해서 고상하고 품위 있게 말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나라 안에서는 온 국민을 상대로 쉽고 소박하게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민중 생존권에 대한 탄압이 어느 정권보다 극에 달해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업적 가운데 하나가 권위주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 민주화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껍데기이긴 하지만) 당연히 그가 쓰는 말도 이에 포함된다. 학생들조차 글 한 줄 쓰면서도 '본인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터에 대통령이 '나는'이나 '저는'이라고 말하는 게 참 듣기 좋다. 요즘처럼 새해를 맞이할 때 '신년휘호'랍시고 웬만한 한자 지식이 없으면 알기 어려운 고사성어를 들먹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맘에 든다.

 

  보통 사람들이 시중에서 쓰는 대로 꾸밈없이 말한다고 대통령답지 않다거나 무식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민주화를 맘껏 누리면서도 권위주의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 독재 시절 '별' 출신의 권위주의적 대통령들에게 어느 정치인이 지금처럼 함부로 야유할 수 있었고 어느 언론인이 할 말을 다할 수 있었는가. 좀 배웠다고 영어나 어려운 한자어 한두 마디 쓰지 않고는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거나 국적 불명의 잘못된 외래어를 남발하며 국어를 훼손하는 정치인과 언론인을 포함한 점잖은 지식인들을 비판해야지 알기 쉽고 평범한 말을 쓰는 소박한 대통령을 욕할 일이 아니다.

 

  또한 군대에서 "썩는다"는 말을 했다고 "신성한" 병역 의무를 모독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같잖다.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할 20대에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 않든 군대에 가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일에 몸담아야 하는 것을 썩는다고 표현한 게 그토록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성에 맞아서든 애국심에 불타서든 군대를 직장으로 삼아 기꺼이 군생활을 하는 장교나 부사관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엄청난 모독이겠지만 말이다. "신성한 병역 의무"를 입에 올리며 대통령을 비난하는 정치인과 언론인 그리고 장성 등 지난날 기득권 세력 가운데 자손을 기꺼이 군대에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보통 사람들이 돈과 이른바 '백'을 써서 아들이나 손자를 군대에 보내지 않거나 후방으로 빼돌릴 수 있었을까. 서민들이 원정 출산이나 국적 포기를 통해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병역을 진짜 거룩하고 성스러운 의무로 만들려면 돈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많이 가진 사람들부터 자기 자식 먼저 군대에 보내고 오래 생활하게 하는 모범을 보이기 바란다. 병역이 진정 신성한 의무라면 온갖 면제 특혜도 없애야 한다. 나아가 군복무 기간 단축 검토를 비판하는 것도 어이없다. 대통령의 말대로 20여 년 동안 북한보다 국방비를 더 많이 썼고 요즘은 10배 이상 더 쓰면서 아직도 북한보다 군사력이 약하다면 뭐가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국방 정책관계자들과 군수뇌부들을 즉각 구속수사 하고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

 

  북핵 문제 때문에 복무 기간 단축이 어렵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북한 핵무기가 남침용이라면 복무 기간을 두 배 세 배 늘린다고 막을 수 있을까. 북한 핵무기가 남한 안보에 위협적이어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다. 그러나 핵위협을 군 복무 기간의 연장이나 단축과 연계시키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는 뜻이다. 난 33개월 동안 군대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지키는 부대에서 고스란히 청춘을 썩었지만 우리 아들이나 조카들이 단 하루도 군대에서 썩지 않게 되면 좋겠다. 그들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져서 돈이나 백을 쓰지 않은 채 법을 어기지 않고도 군대에 가지 않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또래들도 원치 않는다면 군대에 가서 썩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북 관계가 더 진전되면 복무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테고, 더 크게 발전되면 원하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는 모병제를 실시하며, "신성한 병역 의무"라는 위선적인 말도 자연히 사라지게될 것이다. 그렇게 신성하다면 똥별들 중 자기 아들이나 조카들을 자진해서 전방이나 특수부대에서 근무시킨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나 후손들이 군대에서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