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형수에게.

녹색세상 2006. 10. 9. 00:18

이제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시골 길가의 코스모스는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군요. 라일락이 뭔지도 모르는 무딘 시동생에게 ‘라일락 향기가 너무 좋다’며 알려 주신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20대 초반의 철없던 놈이 사십대 중반을 넘어섰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동생 또한 사십대 중반에 들어섰고요. 이제 우리 집안도 명절이면 여성들도 중노동에서 벗어나 계절의 변화를 구경하면서 지난 얘기할 날이 와야 할 텐데 이 시동생은 세상과 맞짱은 뜨면서 집안의 이런 모순은 해결은 커녕 말조차 못 꺼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형수가 결혼하신지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품위가 있으신 사장 어른과 달리 성질난다고 고함부터 지르는 별난 시아버지를 만나 놀라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정민이가 벌써 형수 결혼할 때 나이가 되었으니 우린 안방 늙은이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는 것 같네요. 형님이 마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 제가 늦게 소식을 알아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리곤 했답니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욕심 많은 영감이(큰아버지) 며느리가 재혼할까봐 형님 앞으로 되어 있던 모든 재산 다 가져갔음에도 지금까지 명절이면 찾아오는 형수를 보면서 언젠가 “왜 이렇게 멍청하게 사느냐. 화도 안 나느냐?”고 제가 화를 낸 적이 있죠. 제가 별 풍파없이 살아왔더라면 보라·정민이 입양하고 형수 좋은 분 만나 새 출발했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고 살아오셨을 텐데 힘들 때 제대로 도움 한 번 드리지 못하고 세 치 혀로만 떠들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형님이 공부하던 시절, 제가 가서 하룻밤 신세 지면 일주일 밥상이 흔들리던 살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한번 안 찡그리고 늘 웃음으로 대해 주신 것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군복 입은 놈이 외박 나가면 달리 갈 곳이 없어 작은 외숙부댁과 형님댁을 돌아가며 가곤 했죠. 새댁한테 성인인 시동생이 불편하기도 했을 텐데 정성으로 대해 주신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윤가네 남자들 중에 ‘복현동 도련님들이 별종’이라고 하신 걸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큰집의 형님들과 달랐고, 다른 사촌들과도 저희 형제는 달랐습니다. 그런 탓에 제가 결혼하고도 ‘희용이 저 놈 한테 애들 보내면 이상한 물든다’고 어른들이 아예 안 보내 갓 결혼한 해린이 엄마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모릅니다. 숙모·숙부가 조카들이 귀여워 구경도 시켜주고 싶고, 어떻게 사는지 녀석들도 와보고 싶었을 텐데 새파랄 때부터 낙인이 찍혀 그냥 얼굴만 볼 수밖에 없었죠.

 

큰집 어른들의 그런 몰상식한 처신이 못 마땅해 화도 많이 나 당장 달려갈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큰집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했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예의범절이라면 칼 같은 아버지도 가만히 계시더군요. 성질 더러운 제가 아버지 입장이었으면 아마도 그냥 안 있었겠죠? 불같은 성질 참느라 고생 많았고, 우리 집안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정민이가 중학생이었는데 다음 날 만나 “집안 어른들이 삼촌 빨갛다고 하지 않더냐”고 물었더니 “삼촌 얼굴은 우리 집 남자 중에서 가장 하얀데요” 해 한바탕 신나게 웃었습니다. 색깔론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하는 예리함에 놀랐답니다. 저 같으면 우리 현대사를 동원해 설명해야할 것을 한 방에 청소해 “자식 같은 애들한테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못난 이 시동생이 잘 살기라도 해야 형수께 위안이라도 될 텐데 그러지 못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해린이에게 ‘큰엄마 노릇 못해 미안하다’는 그 말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고, 해린이에게 형수님의 마음을 두고두고 잘 전하도록 할게요. 큰집에서 무리하게 욕심을 내어 재산 꿀꺾하는 바람에 명절에 얼굴 못 본지 오래 되었네요. 어지간하면 참았을 텐데 해도해도 너무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감히 손아래 놈이 “집안 재산 도둑질한 인간들과는 절대 상종 안 한다.”고 문을 박차고 나온 후 제게 큰집과 그 구성원들은 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의 화해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불의한 현실을 그대로 두는 것은 조카들 보기에도 좋지 않은 것 같아 가져간 재산을 제 자리로 돌려놓지 않는 한 인연 회복은 없으며 그 집 문상도 저는 못 갑니다.

 

형수, 그렇게 힘든 세월 새 출발하시지 왜 자식 때문에 힘들게 사셨어요? 아버지한테라도 말씀 드렸으면 친손녀 아니라 할지라도 안 거두어 주셨겠어요? 형수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나서서 도와줄 분이란 걸 잘 아시잖아요? 그랬으면 저의 방황도 짧았을 것이고요. 별난 조부 밑에 자식 고생시킬 수 없다는 형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라 너무 고생만 해 ‘왜 그리 미련하게 사느냐’는 원망 아닌 원망을 수시로 하곤 합니다. 이게 다 제가 험난하게 산 탓이니 죄송하다는 말 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다행히 보라와 정민이가 건강하게 자라 줘 고맙기 그지없네요. 유난히 우리 형제들을 따른 녀석들인지라 조카들 중에 정이 많이 가는 게 사실입니다. 의리 없이 먼저 북망산 넘어간 형님과는 나와의 풀지 못한 악연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친누나 같은 우리 형수, 속내를 털어놓아도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주는 입 무거운 양반. 제가 그 동안 너무 방황하고 살아 늘 가슴 졸이셨죠?

 

이혼 후 왜 그리도 많이 다치고, 병원 신세 많이 졌는지 저도 원망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지난 시절의 시련은 좋은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훈련으로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려합니다. 이제 좋은 인연 만나도록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하늘의 해와 같은 사람으로 해린이를 키우도록 할 테니 '큰엄마 노릇 못 한 것' 너무 미안해 마시고요.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삶의 의지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기대려하는 사람뿐이라 늦어진 것이지 제가 눈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란 건 형수가 잘 아시죠?

 

삶의 의지가 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디 있는 누구라 할지라도 대 환영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 동서될 사람 구해 제일 먼저 형수님한테 인사 시키러 갈게요. 그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주세요.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고 평강의 왕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대구에서 못난 시동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