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니 차례 준비로 정신이 없는 추석 아침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마치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노심초사 하는 노인들이 계셔 대충 하는 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준비를 위한 모든 고생은 여성들이 하면서도 절은 남자만 하는 우리 집의 고약한 풍습은 남자인 제가 봐도 화가 납니다. 환갑이 가까움에도 어른들이 계셔 아직도 열외가 되지 못하는 큰 집의 형수, 바삐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는 제수씨들, 공부에 정신이 없어 가사노동을 배우지 않아 할 줄 아는 게 없음에도 ‘다 큰 여자가 그것도 못 하느냐’는 할배들의 타박을 받는 질녀들의 바쁜 움직임이 눈에 선합니다.
조카 녀석들에게 ‘큰어머니와 누나들이 바쁜데 같이 안 하고 뭐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게 눈치 보이는, 특히 명절의 우리 집 성차별은 아주 심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사내 녀석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는 남성 중심의 고약하기 그지 없는 인습 때문이죠. ‘여자라고 못 할게 뭐 있느냐’며 평소에는 손자ㆍ손녀 차별하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사고체계도 이 날만은 옛날로 되돌아 가버립니다. 평소 같으면 하고 싶은 말 하는데 제사가 있기에 명절만은 눈치를 봐야만 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도 제사상 물리고 음복 한 잔 후 분위기 봐 가면서, 수위 조절도 해야 되지 그러지 않으면 ‘또 별나게 군다’며 눈총받기 딱 좋습니다. 눈치 봐 가며 “갈수록 절할 사람이 없으니 이제 우리도 며느리와 딸도 같이 절하면 안 되느냐?”고 한 마디 꺼내 보지만 노인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아 자칫하면 본전도 못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음식 장만하느라 온갖 고생 다하는 형수와 제수씨의 표정은 곧 박수라도 칠 기세임은 물론이지만 찍힐까봐 눈치만 볼 뿐입니다.
조카 녀석들에게 ‘같은 식구인데 남자만 절하는 건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유도 질문을 던지면 ‘친구들은 같이 하는 집이 많던데요’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입니다. 그럼에도 ‘내 죽고 나거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추석 전에 일이 밀려 무리했더니 너무 피곤해 휴가 겸 남원 초록배움터에서 늘어지게 쉬고 있습니다. 도시에 있으면 머리가 복잡한데 공기 맑은데 와 있으니 시원해서 좋군요.
이래서 피로가 누적되었거나 힘들 때 자연 속에 들어가는 가 봅니다. 창원의 이장규 아저씨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명절에 눈치 안 보고 이럴 수 있는 건 특권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음 명절에는 콘도에서 제사 지내는 걸 관철 시키려고 하는데 반발이 심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평소 모이기 힘든데 콘도나 팬션을 빌려 같이 음식 장만도 하고, 놀면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몇 년 전 했더니 형수와 제수씨들은 대환영이었습니다.
‘형수, 이런 날 같이 모여 윤 가 남자들 험담도 하고 그러면 좋지 않느냐’고 하자 형수는 ‘어른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건데’라고 걱정부터 하면서도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며 좋아하시던 표정이 눈에 선 합니다. 계속 노인들이 반대하면 아예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을 부추겨 여행을 떠나 버릴 작정입니다. 세상 모든 게 비슷하지만 ‘세월이 변했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노인들을 비롯한 구세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표정은 일그러지겠지만 형수의 박수는 확실히 받을 것 같습니다.
덧 글: 인터넷이 안 되어 써 놓은 걸 추석 다음 날 남원 시내 피시방에서 올립니다. 우리 집도 상속 정리가 안 된 집안 재산을 큰 집에서 꿀꺽해 ‘재산 되돌려 놓기 전에는 같이 절 못한다’고 선언을 해 저 혼자 큰 집에 발을 끊은 지 오래되는데 비슷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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