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은 의형제다.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만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감옥을 들락거리다 의형제가 되었으니 장준하 선생 유골에 난 타살 흔적을 보는 심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하신 후 지금까지 기일이 되면 고문 후유증으로 불변한 몸을 이끌고 현장을 꼭 찾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남인 장호준 씨가 귀국한 후 유족에게 장 선생의 추모 관련 일을 넘겼다.
두 분은 부산 피난 시절 백 선생은 어렸고 장준하 선생은 한창 젊었을 때 발간자와 독자로 만났다. 그가 처음 본 것은 장준하 선생과 부인이 사상계를 만들어서 손수레 끌고 팔러 다닐 때였다. 해방 후 임시정부 선발대로 백범 김구 주석을 모시고 귀국해 당시 정치 상황을 직접 체험했고, 어린 백기완은 김구 선생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김 구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 광복군에서 모신 철기 이범석 장군과 함께 하다 그만 두고 못 다한 목사의 길을 가기 위해 한신대에 편입을 했다.
장준하 선생은 그 후 당시 내무부 장관인 조병옥의 비서로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패한 곳에 있으면 나도 부패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부산 피난 시절 사상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 백기완이 그 책에 대해서 유심히 관심을 가지고 읽고 좋아하면서 알게 되었다. 함께 유신독재 반대운동을 했던 팔순의 백기완 선생은 20일 “박근혜 후보는 유신독재의 정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유신독재가 학살한 사건에 대해 당연히 앞장서서 과학적으로 해명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장교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오른쪽)는 일제 관동군 육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사진: 한겨레신문)
백 선생은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과오는 수천년 수만년이 지나도 과학적으로 캐야 된다. 박근혜 후보에 대한 연좌제와는 관계없다. 그런 애매모호한 용어로 역사의 범죄를 눈 가리는 현장에 가담하면 안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 땅의 대통령을 하겠다면 오늘의 역사적인 현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며 “오늘의 역사적 현실은 신독재의 유산과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한 다음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늘진 데, 밝은 데 이런 것이 없는 통일을 이뤄야한다. 그런데 끼려고 한다면 박근혜도 장준하 선생의 암살 내막을 밝히는데 책임이 있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장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선 “새벽 1시쯤 암살 현장을 가봤다. 그 양반이 머리를 들고 다른 손에 피가 묻어나는 걸 보고 '아 여기를 맞았구나' 그랬다”며 “아주 날카로운 쇳덩어리를 가지고 때린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동그란 자국이 안 나오게 돼 있다”고 거듭 타살을 주장했다. 그는 장 선생 죽음의 목격자가 계속 추락사를 주장하는 데 대해선 “중앙정보부, 요새 국정원 직원이 그 사람은 중앙정보부의 사설기관의 정보원이었다고 그랬잖나. 장 선생 주변에서 나하고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장 선생하고 등산을 같이 갈 수가 있냐”며 “그 사람은 무시무시한 암살 학살의 내막을 밝혀야 할 당사자”라고 말했다.
장준하 선생 유골에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에 대해 박근혜가 말할 차례다. 이게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독재자로 살다간 박정희를 아버지로 둔 딸로서 할 일이다. 무엇보다 박근혜는 당시 퍼스트레이디로 실질적인 권력자였으니 연좌제와 결코 관계가 없다. (노컷뉴스, 사진: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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