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삶의 고백 3- 낳은 정 보다 더 무서운 기른 정

녹색세상 2012. 1. 3. 19:27

 

‘낳은 정 보다 기른 정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이 말을 어떤 이들은 ‘가슴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도 하죠. 허물투성이인 인간에게 이런 사랑을 깨닫게 해 준 자식이 있습니다. 이제 21살의 어엿한 청년인 아들입니다. 네 살 때 녀석을 만났습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 한 게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인연이 시작 되려고 그랬겠지만 그럴 때 ‘자식 안 키워 본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 실감나는 것 같습니다.


전 남편과 사별하고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저와 결혼한 여성의 아들이 그 아이입니다. 요즘은 드물지 않아 입방아 찧는 사람이 적지만 제가 결혼할 무렵에는 ‘별난 결혼’이란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니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하자’고 했지만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마다 가족이 생이별해야 하는 불편이 그리 쉽지만은 않더군요. “자식 낳아 키우는 재미도 괜찮다. 새끼도 안 키워보고 무슨 세상을 바꾼다고 하느냐?”는 친구의 압력 때문에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의 아픔을 잊으려 연애에 몰입해 1년 만에 결혼했습니다. 얼마나 같이 살고 싶었는지 결혼식을 하기 전 양가에 말씀드리고 4개월 가량 동거도 했습니다. 후배들은 ‘형님, 결혼과 동시에 아들 문제를 해결했으니 봉 잡았다’고 했으나 친구들은 ‘뭐가 아쉬워 혹 달린 여자와 결혼하느냐’며 반대가 많았습니다. 결혼 후 사실을 아신 부모님들은 며느리에게 아무 말 없이 ‘못난 내 아들과 결혼해 줘 고맙다. 자식 잘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으니 보통 넘는 어른들이시죠.


살림을 시작하기 전 날 청송 산골 처가에 셋이 한 방에 모인 자리에서 아이에게 ‘난 너를 사랑한다. 이젠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인데 괜찮겠니?’ 하자 ‘아버지’라 부르는 녀석을 뜨겁게 부둥켜안고 가족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녀석과 부모 자식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죠. 총각 시절 퇴근 무렵이면 술자리 찾는 게 일이었으나 집에 가면 기다리는 아내와 ‘아버지’라 부르며 달려오는 녀석이 있어 하루의 피로는 멀리 날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태어나자 ‘윤 서방이 딸만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처가에서 하셨으나 전 보다 아들이 더 사랑스러웠습니다. 갓 태어난 딸을 통해 가슴 아파 낳은 자식이 어떤 건지 조금씩 알 수 있었으니 이만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딸이 자라면서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게 없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문제는 내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입양아는 양부의 성을 따를 수 없다’는 민법의 한 줄 때문에 성이 달라 아이가 받는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린 피가 안 섞였지만 넌 내 아들이고, 난 네 아비로 정말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제도란 장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정말 난감하더군요. 생활인으로 교회헌금 대신 후원만 하던 처지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식 문제 해결 때문에 호주제 관련 상담을 시작했고, 자식이 받을 상처에 눈물만 흘렸는데 ‘아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싸우자’는 여성단체의 제안을 쉽게 받아 들였습니다. 덕분에 아이들과 호주제와 관련해 방송 녹화도 여러 번 했습니다.


일제 잔재인 호주제가 어린 생명들을 이렇게 괴롭히니 더 화가 치솟더군요. 6~7년 만에 거리로 나와 마이크 잡고 연설 하려니 어색하기도 하련만 남매가 앞에 앉아 있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연설을 했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나 아비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어린 녀석이 병원에 가면 겁도 나련만 ‘사나이 대장부’만 강조하며 참으라고 윽박지르기고 했습니다. 그런 제가 호주제로 인해 여성 문제에 눈을 뜬 건 순전히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녀석을 만나지 못하고 아이 있는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호주제에 그렇게 분노 했을지, 일제 잔재인 악랄한 제도가 앞길이 수백 만리 같은 어린 생명들과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옥죄는지 몸으로 알았을지 의문입니다. 돈은 없었지만 행복하기만 했는데 1999년 5월 13일 지금까지 남의 일이었던 산재사고가 나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고는 눈 깜짝할 순간’이란 말이 정말 실감나더군요. 근로복지공단의 관리 대상에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겹친 산재 사고와 교통사고 등으로 병원을 들락거렸고 걸핏하면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큰 수술은 아니지만 수술대에 3번 올랐는데 언제부터인지 병원에 혼자 누워 있었습니다. ‘남자가 집안 일을 밖에 알리는 게 아니라’는 남성우월주의가 몸에 배인 탓인지 저도 그리 솔직하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 신부로 있는 후배와 목회하는 선배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떨어져 있으며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무섭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따라 헤어진 녀석과 술 한 잔 하고 싶네요.

 

덧 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재판에 의한 이혼’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렇게 멀어져 갔으며 저는 ‘아이들 장래를 생각해서 연락하도록 하자’고 했으나 연락을 못 하게 해 왕래가 끊긴지 좀 됩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이유에 대해 서로의 생각이 다른데다 사생활이 많이 노출될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