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2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같은 민중교회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프락치란 소문이 돈다’는 말을 들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그 말은 모든 걸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그 놈 프락치’란 한 마디에 멀쩡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조직 보존을 위해 프락치로 몰아 생매장 시킨 일도 많던 시절이라 정말 무서운 말이었다. 대구지역 운동권의 초보였던 스물여덟 청년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저질러 놓고 그는 몇 년 후 대구를 떠난지라 잊어버리고 살았다. 재작년 여름 남원에서 녹색위원회 첫 모임을 하고 용산에 문상 갔다가 보고, 그 후 대의원대회에서 만나 더 놀랐다. 아무리 24년 전의 일이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몇 번 그냥 지나쳤다. 임시대의원대회 때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하면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이 어물쩍 넘어간 상태다. 지난 시절의 상처를 씻고 화해하는 게 아니라 어색하게 인사하려니 지금도 정말 불편하다.
잠시 시계를 1987년으로 되돌려 보자. 소문을 듣고 교회 선후배들이 ‘입 함부로 놀리는 아무개 새×를 그냥 두지 않겠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며 난리치자 막말을 뱉은 그는 ‘실수’라고 했다. 운동권에서 생매장 시킬 수 있는 말을 해 놓고는 ‘순간적인 실수’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그의 친구였던 같은 교회 목사와 지난 정권 장관을 지낸 선배는 ‘잊어버리라’고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 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프락치’란 말은 자연스레 묻혔다.
부문 운동이 취약해 민중운동의 조직이 결성되기 전 민중교회는 장소도 제공하는 등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고, 많은 청년 활동가들이 있어 정보과와 대공과(보안과)의 감시 대상이었다. 교인들끼리는 어려운 시절 함께 해 각별한 동지들이다. 문상을 갔다가 ‘용산에서 그 사람 만났다’고 하자 ‘그 인간이 왜 거기 있느냐?’며 한바탕 시끄러웠다. 누구는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이젠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난 속이 좁은 탓인지 잘 잊혀 지지 않는다.
상처를 준 그가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한다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으나 지금처럼 어물 쩡 넘어간다면 나 역시 근성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용서는 잘못을 고백해야 시작이 된다는 건 중학생도 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한 예수도 용서의 전제조건을 회개(悔改)로 명토박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상처를 줘 미안하다’고 한다면 24년 전의 상처는 바로 아물기 시작할 것 같다. 올해가 가기 전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과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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