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삶의 고백 1 ― 축첩에 친일까지 한 우리 집안

녹색세상 2011. 12. 19. 12:04

매관매직에 3대에 걸쳐 축첩한 집안


우리 집안은 증조부ㆍ조부ㆍ백부까지 3대가 두 집 살림을 했습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일제 수탈에 협조까지 했습니다. 저 보다 8살 위인 종형은 여의도문제연구소 전신인 ‘민정당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젊음을 보냈습니다. 대구의 일부 동지들은 알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건 처음입니다. ‘그런 인간이 무슨 진보정치 운운하느냐’고 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대학 가는 게 힘들던 시절 대학원까지 마치고 군사정권에 영혼을 팔았던 종형이 지금도 밉습니다.


잠시 역사의 시계 바늘을 돌려 봅시다. 첩살림 했다는 사연을 접해 본 40대 이상은 생각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지요. 돈 있고 권력 있는 덜 떨어진 남정네들이 해대는 짓이지요. 증조부는 구한말 현풍현감(달성군수)을 돈으로 사려다 포산(현풍) 곽 씨에게 밀려 ‘논공면장을 지냈다’며 집안에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돈으로 벼슬을 사려한 게 부끄러운 일임에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오직 한 자리 하면 된다는 걸 보고 어린 우리 형제는 놀랐습니다.


계산을 해 보니 일제 수탈이 시작될 무렵이라 ‘면장은 친일파니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자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버지이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 후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돈으로 권력을 사려던 증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민족을 수탈하고 일제에 기생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크던 작던 친일파의 후손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증조부에 이어 조부도 두 집 살림을 해 두 분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는데 일이 생기면 논리나 생각이 아닌 같은 배끼리 똘똘 뭉치는 걸 수 없이 보고 자랐습니다. 천지 못할 짓이 두 집 살림이란 걸 우리 형제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요즘과 달리 사별한 여성들이 먹고 살 길이 없던 시절,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어 몸을 의탁할 곳이 있으면 두 말 없이 갈 수 밖에 없었지요. 우리 역사는 여성들의 피눈물이 바닥에 늘려 있다는 걸 세상에 눈을 뜨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영혼을 판 종형의 사연


뿐만 아니라 살아계시면 곧 환갑인 종형은 일류대학과 대학원까지 나와 집안의 기대를 온몸에 받았는데 겨우 한 게 군사독재정권에 지식을 파는 짓이었으니 최소한의 양심도 없지요. 관악골 훈장으로 있다 민정당에 몸을 판 배성동의 고등학교 후배라 87년 말 선거 작업 하러 와 11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우리 대장 선거 운동 좀 해 달라’고 했다가 ‘그런 전화 안 받고 싶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돈이라면 덥석 물줄 알았는데 되려 한 방 먹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 후 술이 늘어난 종형은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고생 더해 학위 받았으면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눈 앞의 달콤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군사독재 정권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종형의 동생인 제가 ‘진보정치와 민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오만인지 모릅니다. 이제 쉰 줄에 들어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말하는 진보정당의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나마 고백하고 나니 조금은 속이 편합니다.


우리 집안의 일과 관련해 ‘친일파의 후손도 부족해 군사정권에 영혼을 판 집’이라고 어떤 비난을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민족해방 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잘 아는데 당연히 들어야지요. ‘당장 진보신당을 떠나라’는 소리만 아니라면 어떤 욕이라도 들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설프게나마 이런 고백을 하는 인간에게 ‘우리 함께 가자’는 동지들이 계시리라 믿기에 이제야 감히 입 밖에 꺼냅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질녀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