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아까운 사람들(2)― 삼성에 있는 후배들

녹색세상 2011. 5. 11. 12:47

삼성이 돈으로 찍은 아까운 후배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청년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변혁을 갈망하는 많은 청년학생들 치열하게 싸웠다. 그 무렵 당구장에 붙어사는 후배들을 보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며 질책을 한 친구가 있었다. 6년 후배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훨씬 앞서 있었다. 좀 안답시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무식한 내가 ‘어떤 책을 봐야 하느냐’고 물으면 바로 책을 보여 주며 권하기도 했다.

 


남들과 달리 이 후배는 ‘문건에 매달리지 말고 원론에 충실하라’는 자극을 준 고마운 은인이다. 덕분에 나는 ‘무식한 저 선배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 세워 가며 공부하도록 자극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주말이면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를 누비고 다닌 것도 치열하게 살아간 그런 후배들 때문이다. 그런 귀한 인연을 만난 건 결코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 감히 고백한다.


둘 다 삼성에서 밥 법이 하며 살고 있다. 한 후배는 아버지가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계서 돈 안 드는 사관학교에 가려고 했다. 자기 양심에 멀쩡한 사람 고문은 못해 경찰대는 피하고,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사관학교를 택했다. 고3이 그런 판단을 했으니 난 놈이다. 친구와 후배들은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 모두 말렸다. 스카이대 합격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모든 걸 통과했으나 신체검사에서 혈압이 높아 떨어지고 말았다.


가난하고 똘망한 놈들을 싹 쓸어간 삼성 장학금


민감한 시절인 고3에게 불합격이란 통보는 큰 충격이었다. 몇 달을 방황하며 술로 살았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성적은 바로 곤두박질 쳐 복현골도 못 가고 수첩공주의 학교로 갔다. 대학가서 학습을 하는 가 싶더니 ‘형님, 삼성에서 장학금을 줘 받았습니다’기에 학비 보태 줄 형편도 안 되니 ‘공부 잘 하라’고 했다. 삼성의 장학금을 받은 후부터 서서히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집안을 책임져야 할 처지라 모든 걸 접고 공부만 했다. 지금도 만나면 후원금 내 주는 이 후배가 고맙기만 하다.


다만 좋은 친구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삼성재벌의 부속품이 되어 있는 현실이 속 상할 따름이다. 위에서 먼저 거론한 후배는 관악골 사대에 진학했다. 과학 관련 교육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후배를 보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질타를 해 이 친구를 보면 피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다음 날 할 일이 있으면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도 책을 보다 잘 정도라 내가 부끄러웠다.


당구장에 가지 않고 화투짝을 손에 들지 않은 것도 이 후배 덕분이다. 그 시간에 책 한 줄 더 보고, 체력관리 하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였다. 바싹 마른 체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친구가 자취방에 비표를 설치해 두고 다닐 정도라니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집에 가 보면 책장에 책이 가득 차 있었다. 다 손 자욱이 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순간 기가 죽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조용하던 후배가 입만 열면 멈추지 않고 열정을 쏟아내는 이유를 알았다.

 


삼성으로 보낸 원인 제공은 내가 뱉은 말


1987년 난 후보 단일화를 말 할 때 그 후배는 ‘민중후보여야 한다’며 선배를 부끄럽게 했다. 대학 3학년이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한다며 과외까지 하며 선거자금을 조달하곤 했다. 그 후배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치열해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다. 몸이 좋지 않아 병역 면제를 받자 ‘그 시간을 활용하자’며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박태호(이진경)를 비롯한 사회ㆍ경제학 전공자들과 학습할 정도로 내공이 대단했다.

 

더 놀란 것은 이미 그 때 ‘운동권 사투리는 오만의 극치’라며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다. 고가의 비밀과외가 있던 시절이라 돈 없는 촌놈이 한 두 개만 해도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음에도 ‘연구와 학습에 지장있다’며 몇 개월 하다 그만 둘 정도였다. 그런 후배가 박사과정에 진학해 ‘삼성장학금’을 받으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를 했으면 뛰어난 교육운동의 활동가가 되었을 친구인데 ‘이왕 시작한 공부니 박사학위는 받는 게 어떠냐’고 무심코 던진 게 화근이었다.


그 말 한 마디가 사람의 운명을 바뀌어 놓고 말았으니 원인제공자인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재벌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할 정도가 아니라 ‘시작한 공부는 마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한 말인데..... 공부는 해야 되고 돈이 없으니 삼성재벌이 준다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는 삼성이 지금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니 주는 돈 그냥 받은 것이다.


똑똑한 놈들은 다 가고 멍청한 선배는 남아 있고


지금 같으면 ‘다른 건 몰라도 삼성 돈은 받지 말라’고 할 텐데 내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를 했으면 뛰어난 활동가가 되었을 친구인데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으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위 받고 가면 과장인데 교사 월급과는 비교가 안 되니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사람이 변해갔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나 한 동안 전화받는 것 자체를 거북해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낸지 오래되었다. 17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에 도수 높은 안경,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후배들을 아끼던 그 친구야 말로 선생 체질인데 길이 바뀌면서 모든 게 달라져 ‘안타까운 사람 버렸다’는 생각을 수 없이 한다. 역시 자본의 힘은 막강해 사람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선배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후배를 보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삼성전자에서 구조조정이란 말이 나올 때 마다 안절부절 하며 살아가는 그 친구가 너무 아깝다. 교단에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아야 할 후배가 삼성재벌의 부속품이 되어 있어 정말 속이 상한다. 그렇게 똑 소리 나던 관악골 서생은 재벌회사에 다니고, 멍청한 선배가 진보정당에 다리 걸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자식 이야기라도 하며 한잔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