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주간조선 이재오 기고문 발췌
창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1979년 8월 8일 엠네스티 사무실에 출근하여 책상 위를 정리하고 안동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평(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이태호 간사에게 일부 주고 일부는 보관철에 꽂고 있다가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연행되었다. 서부경찰서에서는 정보부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안동강연 녹음테이프가 여기 있으니 이 내용을 가지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 연설 중 어느 대목이 긴급조치 9호 위반 내용이냐고 심하게 따지자, 좌우간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까 우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꾸며서 구속하였다. 그것이 박정권 하에서 내가 세 번째 투옥되는 사건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세 번째 들어가서 1사 상 21방에서 재판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1979년 추석 전날로 기억된다), 다음날이면 긴급조치재판이 시작되는데, 저녁 무렵 출정이라면서 교도관이 감방문을 열었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들었다. 출정 전날 불려나가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보완과장실에 가니 낯선 젊은이가 두 명 와 있었다. 몇 마디 신병을 확인하고 수갑을 채워 끌려간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 이었다. 내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첫 번째 출입하게 된 것은 감방에서였다. 그러나, 대공분실에서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73년,77년, 두 번이나 나를 투옥시킨 이근안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살인적으로 고문을 당한바 있었기 때문에 우선 겁부터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나 간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죽어나간다, 죽어나간다, 하는 공포감이 순간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서 죽느니, 죽어서 사는 사람이 되자, 그 순간부터 나는 고문을 온몸으로 받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신이 아니고 인간이었다. 죽기를 각오할수록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고문은 시작되었다. (사진: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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