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친일인명 사전 국민보고 대회 날 어느 친일파 후손의 고백

녹색세상 2009. 11. 8. 23:11

저희 증조부께서 구한말에 돈으로 현풍현감을 사려다 포산(현풍) 곽씨에게 밀려 논공면장을 지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증조부 때부터 방앗간을 했고 조부와 백부 때까지 이어졌으니 비록 골짝이이긴 하지만 살림살이는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3대가 2집 살림을 살았으니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얼마나 먹고 살만 했으면 벼슬을 돈으로 사려했겠습니까? 청소년 시절 걸핏하면 ‘호랑이 면장 할아버지’라며 증조부 이야기를 하기에 귀를 쫑긋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돈 벌어 기생집 많이 들락거린 어른이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습니다.

 

▲ ‘친일인명사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 받았으며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사진을 기록한 내용을 시민들이 읽어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그런데 철이 들면서 알고보니 호랑이로 소문난 증조부께서 면장을 한 시기가 일제 수탈이 시작될 무렵이더군요. 혼자 속만 끓이다 3년 아래인 동생이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 아니냐’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이 대학 입학 후 수시로 최루탄을 마시고 들어오면서 형제의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 시절 그런 고민 하지 않았다면 이상하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말씀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라 어렵게 꺼냈습니다.


어느 명절에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구한말 벼슬을 돈으로 살 정도였고, 면장을 지냈다면 친일파입니다.”고 하자 노발대발 하시더군요. “이 놈들이 어디 조상을 친일파라 하느냐”시기에 “그 시기면 일제 앞잡이가 아니고는 벼슬을 할 수가 없었다.”는 갓 스물을 넘긴 자식들의 근거 있는 말에 아버지는 침묵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증조부에 관한 이야기는 아버지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유난히 총명해 증조부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비슷한 연배의 집안형님들로 부터 들었습니다. 조부로부터 받은 사랑이 남다른데 자식들 때문에 침묵해야 하니 속이 많이 상하셨지요.


그렇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자식들에게 져 주신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지 나이 먹어가면서 조금씩 느낍니다. 11월 8일 드디어 친일인명 사전 발간국민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한 지난 세월 때문에 정부에서 방치한 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잔재 청산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했으나 행사 장소인 숙명여대 예술관에서 안전을 문제로 일방적으로 ‘대관취소’를 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어도 숙명여대의 교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장소를 옮겨 백범 김 구 선생님의 묘소 앞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숙대 앞에 모인 500여 시민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날, "천만 겨레의 염원이 실현된 날”이라는 사회자 말에 환호로 화답했고 “국민들의 힘으로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고 적힌 펼침막 뒤를 따라 발간보고대회가 열릴 백범 김 구 선생님의 묘소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500여 시민들이 모두 앉기엔 마련된 의자 수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8일 오후 서울 효창동 백범 김 구 선생 묘소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청산’, ‘친일타도’가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땅도 전날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젖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여든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빽빽이 앉았습니다.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를 지켜봤습니다. 발간 보고대회 행사의 시작은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함께 사전을 백범 김 구 묘소에 헌정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8년 간 각고의 노력 끝에, 국민이 만든 사전에 축복을 보냈습니다. 윤경로 위원장은 사전을 들고 “드디어 해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윤 위원장은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돼 이뤄졌어야 할 일을 60년 긴 세월 끝에, 민족문제연구소 설립 18년 만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출범 8년 만에 나왔다.”며 “그야말로 산고와 산고 끝에 사전이 나왔음을 국민 여러분께 보고 드린다.”고 눈물겨운 말을 했습니다. 이어, “세 권으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엔 총 4389명이 수록돼 있다”며 “한 역사학자는 1905년부터 1945년 간 친일을 한 이가 어떻게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며 70만 명으로 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연구소는 정말로 역사적ㆍ실증적으로 검증을 거쳐 인물들을 수록했다.”고 전했습니다.


윤 위원장은 또 “그 후손들이 불편하고 안 됐지만 저 역시 문중의 여러 분들이 사전에 들어가 있다”며 “당시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옳지 못했다면 훗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그동안 우리가 너무 간과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가 좀 더 성숙하려고 한다면 모든 잘못을 외세로만 돌려서는 안 되고 내부의 자기 모순과 자기 왜곡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일개 한 정파ㆍ정당,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분노하고 실망하고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임헌영 소장도 “이 사전의 발간으로 근·현대사 이후로 한국 지배층의 윤리관이 바뀌리라 생각한다”며 “지배층들,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돈과 권력의 목적에 따라 후세 제2의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와서 여러분의 행적을 기록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임 소장은 또 “사전은 나왔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며 “앞으로 험난한 길이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통일, 민주주의 정착, 모두의 사회복지를 이룩하는 길을 함께 해주시길 당부드린다.”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지금까지 1천여 명 정도가 사전 판매를 예약했다”며 “앞으로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계속 예약을 접수한 후 이달 안으로 일괄 배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오늘 보고대회에 오신 분들께 사전을 판매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앞으로 모든 초ㆍ중ㆍ고등학교와 지역 도서관 모두에 사전이 꽂힐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라나는 후세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든 학교와 지역 도서관에 빠지지 않고 있을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란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 증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올 정도의 친일 행위를 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렇지만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벼슬을 돈으로 사고, 면장을 지냈다면 일제에 협조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데 어느 누가 욕할 것이며 돌을 던지겠습니까? 오히려 그 용기를 칭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얼마나 일제에 협조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자손 된 자로서 감히 사죄합니다. 지천명의 언덕에 들어선 한 친일파 후손이 민족과 민중 앞에 하는 고백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오마이뉴스 일부 인용)


추 신: 저는 지금 ‘삽질 대신 일자리를ㆍ언론악법 철폐’를 외치며 전국 자전거 일주 중에 있습니다. 많은 민주시민들의 정성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증조부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시면) 58살 되는 일류대와 대학원까지 졸업한 종형 한 분은 민정당 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스트레스에 못 견뎌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기도 한 별로 좋지 않은 집안입니다. 진보정당의 구성원으로서 이 정도 고백은 해야 할 것 같아 글을 올립니다. 조상과 형의 모든 잘못에 대해 그 어떤 욕이라도 달게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