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연애 전선’에 나서는 중년들

녹색세상 2009. 9. 27. 20:08

중년의 성 생활에서 로맨스로 범위를 조금 넓혀보겠습니다. 성 생활은 ‘원초적 본능’이긴 하나 애정 관계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그리는 연애 감정이 성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젊을 때는 대체로 성적 매력 때문에 상대방에게 이른바 필이 꽂힐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적 매력에 더 눈길이 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연애에 ‘나이 상한선’은 없고, 시니어의 로맨스는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따금씩 감칠 맛 나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 일단 ‘비정상적 관계’에 대한 의심부터 하기 십상입니다. 지난 3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소재로 얘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앤은 2년 전 85살인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폭탄선언’을 듣습니다. 두 차례 이혼을 거쳐 혼자가 된 아버지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나이에 누굴 만나겠다고, 참” 하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6개월 쯤 뒤 아버지는 급히 전화를 걸어와, 그 사이 멋있는 여성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아래는 영국 일간 ‘가디언’의 관련 사진)

 


이어 이 여성이 살고 있는 조지아 주로 이사 갈 생각이라고 밝힙니다.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1960년대에 시민운동에도 참여한 사랑스런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여성이 아버지를 사랑하다니”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앤은, 이 여성이 아버지보다 19살 어리다는 말에 아연실색을 합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실버타운에 있는 집을 처분한 뒤 이 여성을 돌보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앤에게는 ‘공습경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된 홀아비를 등쳐먹고 내팽개칠 게 불 보듯 뻔한, 얼굴 반반한 할머니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지체 없이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가 갖가지 얘기로 만류했습니다. 차분하게 듣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여기서 계속 산다면, 내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앤은 “십대라면 집 안에 감금해 버렸을 텐데”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달 뒤, 앤은 20년 전에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를 찾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의 ‘새 살림’을 감시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만남에서 이 여성을 좋아하게 된 자신들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로맨틱한 관계를 계속 가꿔나가기 위해 가깝게 지내면서도 한 집에서 살지는 않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앤은 더더욱 마음이 놓였습니다. 얼마 뒤 이 여성은 무릎 관절이 너무 상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옆 아파트로 이사해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자 마을로 이사해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나이에, 자기 앞 가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이를 위해 쇼핑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애견 산책도 시킵니다.


심장이 좋지 않아 반 블록만 걸어도 쉬어야 하는 사람이. 앤에겐 엄청난 실수로 보이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행복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기사 소개가 조금 길었습니다. 풋사랑을 할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어 물불을 못 가린다고 하지만, 살 만큼 산 사람이 이런 희생을 달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의 로맨스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특히 여성들일수록 2004년 제가 도쿄특파원을 부임했을 무렵, 일본 중년 여성들 사이에 ‘겨울연가’와 욘사마(배용준씨의 일본식 애칭) 열풍이 참으로 뜨거웠습니다. 젊을 시절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 배경입니다. 나이가 들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연애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젊은 시절과는 다른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얘기입니다. 세상을 충분히 살지 않았을 때 가졌던 많은 환상이 사라진 뒤이기에 더욱 깔끔할 수 있는 것이죠. 


적당히 쭈글쭈글 해지고, 그리 가꾸지도 않고, 무수히 많은 약점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 사람이 좋을 때, 그것은 젊은 시절과는 또 다른 순수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년이 되면, 이혼, 사별 등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독신도 예전에 비해 흔해졌습니다. 영국의 한 결혼정보업체에 따르면, 영국에선 65살 이상 남성의 30%, 여성의 60%가 ‘배우자가 없는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혼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여서 이런 수치는 갈수록 증가하겠지요. 다른 나라도 사정이 비슷할 것입니다.


왕성한 활동력과 늘어난 수명은 ‘연애 전선’에 나서는 시니어 전사들을 크게 늘리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선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한 데이트 서비스가 붐을 이루고, 관련 온라인 사이트가 급증세를 보입니다. 데이트를 즐기는 시니어들로 극장가 수입도 짭짤합니다. 더스틴 호프먼과 엠마 톰슨이라는 호화 출연진을 앞세워 중년의 사랑의 그린 '라스트 찬스 하비'는 지난해 연말에 개봉해 3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아래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젊을 때는 대개 연애를 거쳐 결혼에 이르거나,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연애를 합니다. 흔히 ‘연애의 무덤’으로 불리는 결혼이 골인 지점인 셈입니다. 중년의 로맨스에는 정해진 행로가 없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연애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둘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살더라도 젊은이들의 동거에 비해 자연스럽습니다. 결혼이라는 법률적 틀에서 벗어나면 ‘쿨’한 관계가 가능합니다. 이는 다 커서 새 아버지나 어머니를 맞는 게 반가울리 없는 성년이 된 자녀들과의 마찰을 줄여줍니다. 중년 이후의 결혼에서 흔히 나타나는 재산을 둘러싼 잡음의 여지도 없앨 수 있습니다.


결혼을 원할 땐, 재산 문제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깔끔하게 매듭을 지어두면 두루 편해집니다. ‘결혼 전 서약’의 형태로 새 배우자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방법 같은 게 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혼자가 되면 다시 젊어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의욕을 잃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독신 클럽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함께 살 사람을 찾는 게 아니다. 그냥 즐거움을 나누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계획을 짜고, 휴일에 놀러갈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가디언’에 실린 64살 시니어 여성의 말입니다.


알 것을 다 아는 나이인 만큼, 이메일 등으로 일찌감치 탐색전을 끝낸 뒤, 편안하게 성 생활을 함께 누릴 수도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잡지 기사를 보니, 새로 데이트를 시작한 시니어들은 보통 두 번째 만남에서 성 관계를 갖는다고 하는군요. 사랑을 느끼는 단계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죠.부부가 손을 꼭 잡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연애 감정으로 설렐 수 있는 ‘나 홀로 중년’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중년이 돼 누리는 성적 자유는 연애 감정을 더 충만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중년이 돼 다시 파트너를 만난 시니어 1천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첫 사랑을 다시 만났을 때 행복한 관계가 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박중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