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범법자들에게 인도주의는 온당치 않다’는 쌍용차임원의 궤변

녹색세상 2009. 7. 21. 12:02

 

옥쇄파업 중인 쌍용차 관련 기사를 보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길 없어 이 글을 씁니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이제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수많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존문제로 떠  올랐습니다. 나아가 경제위기를 맞은 한국이 어떻게 그 고통을 분담하고 미래를 기약해야 할 것인지, 돈과 기업 위주의 해결책을 찾을 것인지, 사람 위주의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선택할 것인지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성 중인 노조원들에게 최소한 ‘식량과 의약품 등은 전달하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 쌍용차의 기획재무본부장(상무) 최상진이라는 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쌍용자동차 사측이 공장 내 단수를 실시한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금속노조 주최로 열린 ‘정리해고 분쇄 결의대회’를 마친 뒤 금속노조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점거농성중인 노조원들에게 생수를 건네주자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생수를 옮기고 있다.

 

“일부에서는 공장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식량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는데, 범법자들에게 인도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일단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쌍용차 문제에 대해 노측의 입장에 가깝든, 사측의 입장에 가깝든 그런 것은 뒤로 미룹시다. 식량이 전달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입장 차이도 잠시 접기로 합시다. 먼저 인도주의라는 단어가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인지 함께 고민해 봅시다. 그러면 그 배후에 숨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인도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방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것을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범법자이건 아니건 인도주의적으로 물품을 제공하자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범법자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물품 제공이 불가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곳곳에 인도주의를 직접 실천하는 적십자사를 봅시다. 그 기본적 이념은 조금 전까지 우리 병사를 죽이던 적군이라 해도 생명을 보호하고 치료해 준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도주의의 핵심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보편성이야말로 인도주의가 인도주의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기사에 인용된 말에 의하면, 쌍용차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한해 노동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한다는 말인가요? 혹시 이전에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식사나 물 등을 회사는 인도적 지원이라고 생각하며 제공했단 말인가요?


식당에 가서 돈을 낸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인도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돈을 내지 못해 식당주인에게 음식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불쌍한 사람에게 거저 음식을 제공할 때 인도주의적이라는 말을 적용합니다. 적십자사가 관타나모에 있는 수용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펼칠 때, 그리고 미국정부가 제한적이나마 이를 허용할 때, 이들이 범법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사 범법자라고 해도 그런 지원을 받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 인도주의가 표방하는 생각이지요.

 

▲ 구사대와 회사 측이 고용한 용역깡패와 경찰병력이 뒤엉켜 있는 것은 기업의 문제에 공권력이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서로 옷을 바꿔 입을 정도로 끈끈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때로는 말 하나의 사용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인도주의에 대한 쌍용차 관계자의 발언 역시 쌍용차 사측이 노동자들을 대하는 입장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측은 범법자이며 인도주의적 고려의 대상도 아니라고 말할 때, 이들에게 노동자는 이미 인간조차 존재이며 따라서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 역시 들어설 곳이 없습니다.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그 관계자 한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를 통해 드러난 쌍용차 사측의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걱정합니다. 이를 방치하는 경찰의 처사는 굳이 거론할 가치조차 없지요.


그리고 그 배경에는 그간 우리 사회가 인도주의와 인권과 같은 가치를 소홀히 생각하고 무시해온 역사가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쌍용자동차 정도의 회사에서 상무에 오르려면 똑똑한 사람이고 ‘일 중독자’라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책임감도 강하지요. 그런 그의 성장과정 혹은 교육과정 중에 단 한번이라도 인도주의나 인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제공되었다면 적어도 이런 막말을 해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요? 적어도 내 경험의 경우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그런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주의나 인권 더 나아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성숙한 사회는 경제적 성장에 부록처럼 딸려오는 무료제공 서비스가 결코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이를 교육하고 중시하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반 세기 넘도록 이를 위해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매우 훌륭하고 똑똑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논의의 수준이나 실천의 내용은 전혀 성숙해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은 소외되고, 경쟁에서 탈락하면 무자비하게 버리고 맙니다.


성공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긴장의 나날일 뿐 인간미는 도통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 개인과 사회가 불화하는 사회. 이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의 모습입니다. 돈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회가 개인을 배려하면서 약자도 강자도 자신의 상황에 맞게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부럽지 않은가요? 이런 세상은 절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 복지국가들의 역사의 교훈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의 큰 방향을 돌리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 우리 다음 세대에라도 그런 세상이 오도록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너무 늦었으니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