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체벌은 곧 폭력,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녹색세상 2009. 5. 3. 21:45
 

학창시절 교사로부터 당한 폭력의 악몽은 오래도록 간다. 감정을 잔뜩 실어 뺨을 때리는 게 아니라 귀싸대기를 쳐 바른 인간들도 많이 봤다. 나이 쉰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직접 피해자가 아닌 그 장면을 보기만 한 나에게는 엄청난 폭력 후유증으로 남아 있어 기억을 떠 올리는 것 조차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다. 첫 수업 시간에 무슨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시비를 걸어 ‘너 나와’라며 바로 학생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쳐 바르곤 했던 고교 시절의 ‘뱀대가리’를 잊을 수 없다. 장난치고 떠들었다고 중학교 1학년짜리를 불러내어 서로 뺨을 때리도록 시킨 인간도 있었다. 같이 장난친 판사 아들은 불러 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교사는 근평이 2배나 되는 국립사범대 부중에 오래 근무한 덕택에 장학사를 그쳐 교장으로 퇴직했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뺨을 때린 상식 이하의 인간도 있었다. 교감이란 자가 체육 수업 중에 담당 교과 교사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뺨을 쳐 바르는 짓거리도 해대었다. 청년 시절 대구교대 부근에서 고교 시절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교감과 폭력을 휘두른 인간들이 같이 있었으나 선생님에게만 인사를 했다. 사정을 아는 그 선생님은 자리가 불편하시자 ‘자네 안 바쁜가, 다음에 만나도록 하세’라며 일부러 그 자리를 피하셨다. 폭력 휘두른 교사들에게 ‘스승’이란 말을 쓰지 않고 ‘그 인간’이라 부른다. 간접 피해자의 상처가 이 정도로 큰데 당사자의 상처를 얼마나 크고 골이 깊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피해자에게 더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입장에 서 보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는 양비론이 아직도 판을 치는 현실이다. 사람의 가치관과 철학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똥 철학이 아직도 설친다.


체벌로 인한 사고와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왜 사랑이라는 이름의 체벌이라는 폭력이 난무를 하며 많은 문제를 야기할까? 그것은 체벌이 현실의 세계에 폭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오래전부터 체벌을 금지했다. 체벌이 사용되는 배경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아이들에게 공포심을 주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그 폭력이 정당하지도 교육적이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으며 폭력은 습관이 되어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적응이 되어 무감각하데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에 따라서는 간단한 체벌을 보는 것 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심한 체벌에도 별 반응이 없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다음에 더 큰 체벌을 사용하여야 아이들을 통제하게 된다.


체벌과 폭력은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라 사실상 구분이 어렵다. 폭력교사는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체벌을 손쉽게 사용하다 보면 심한 체벌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체벌이라는 그 수단은 사실상 폭력으로 명백한 범죄이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만 예외로 인정될 뿐 교문을 나서는 순간 체벌은 곧 범죄행위로 취급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사법처리 대상이다. 지금까지 무심코 그리고 손쉽게 사용하는 체벌이 폭력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아직도 우리는 체벌을 한국인의 독특한 교육방식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종종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범죄행위로 한국의 부모가 자녀를 체벌하여 구속당하는 상황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듣는다.

 

 

여고생의 치마를 벗기는 것은 심한 모멸감을 주는 아주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다. 사람을 80대 때려도 역시 폭력 행위로 범죄다. 이것에 대하여 이유를 달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때리면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 하지 않으면 학교 폭력의 고리는 결코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체벌이 허용되는 일부 나라는 극히 제한적으로 학부모와 의사의 승인을 받고 다른 사람의 감시 하에 여학생은 반드시 여교사가 체벌 할 때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행위에 대하여 법적인 제제를 가해야 할 때가 벌써 지났다. 외국의 인권단체에서 매번 한국의 학교체벌을 문제 삼는 것도 그렇거니와 동영상 해외사이트에 한국 학교의 체벌동영상이 올라 있는 것은 인권 후진국임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20대 후반 사무실 인근의 목욕탕에서 보기만 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몽둥이로 학생들을 때린 폭력 교사를 만났다. 교육청인근이라 ‘근무 중에 나온 걸 보니 팔자 좋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끝까지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간단히 운동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시설이 좋은 곳이라 수시로 이용했는데 그 후 몇 차례 보았지만 외면했다. 알아보니 교육청에 장학사로 근무한다고 들었다. 어린 중학생들에게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른 그런 인간을 스승이라 부를 수 없기에 난 그렇게 했고 지금도 아는 척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했다’는 말도 하지만 ‘그런 놈에게 인사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지배적이기도 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른 자를 스승으로 부를 수 없고 ‘은사님’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간접 피해자로서 당연한 권리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고 했다. 약자인 어린 생명들을 향한 어떤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부모들의 체벌 역시 마찬가지로 ‘때려서라도 인간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저 멀리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져야 한다. 맞고 자란 아이는 훗날 반드시 가해자로 둔갑해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고야 만다. 이제는 학교체벌을 치외법권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금지시켜 자라는 어린 생명들을 체벌이라는 폭력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 역시 자식을 자신의 물건처럼 사정없이 때리는 것 역시 법적으로 제재를 해야 한다. 폭력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면 우리 사회 앞날은 결코 밝을 수 없다. 폭력 가해자의 처지를 생각하라는 것은 ‘폭력에 동조하는 것’이지 결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그래서 양비론은 어슬프기 그지없는 개똥철학일 뿐 제대로 된 논리가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