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대구의 제119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행사

녹색세상 2009. 5. 2. 05:35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오거스트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을 떠올리는 심경은 한마디로 착잡하다. 그가 다른 노동운동가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남긴 이 유언이 100년이 지나도 슬픈 유산으로 재 상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만국의 노동자들은 억압과 착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886년 5월 1일, 노예 같은 삶을 세상에 알리며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던 미국 노동자들. 전국적으로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굴종의 사슬을 끊기 위해 일어섰다. 미국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시카고에서는 5월 3일까지 파업이 이어졌다. 그날 멈춘 것은 작업장의 망치소리, 공장의 기계소리만이 아니었다. 자본으로 노동자의 영혼까지 살 수 있다는 자본가들의 오만이 함께 멈추었다.

 

 

 

이 과정에서 시키고 경찰이 맥코믹 리퍼 작업장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총을 쏴 어린 소녀를 포함하여 6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만행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다음날(4일)부터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루어졌다.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 때다.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헤이마켓 광장에 모여 경찰 만행을 규탄하는 가운데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누군가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경찰 7명이 즉사했다. 그러자 흥분한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해 시위노동자 2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 직후 폭동교사와 살인 혐의로 노동운동 지도자 8명이 체포됐고 이듬해 4명이 처형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1명은 처형 직전 감옥에서 자살했다. 7년 후 폭탄투척은 자본가들이 꾸민 공작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종신형을 받았던 3명은 1893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죽은 자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 특히 1886년 헤이마켓 사건의 노동열사 8인의 죽음은 메이데이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국제사회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1889년 7월,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드디어 세계의 철문을 두드렸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거대한 첫걸음이 내딛어진 것이다. 세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열린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메이데이)로 선포했다.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국제 연대시위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침내 1890년 세계노동자들은 나라마다 모여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불꽃은 그렇게 타올랐다.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외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바로 그 불꽃으로 세상의 모순을 태우는 들불의 노래였다. 이 땅의 선배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투쟁은 시련이 많았다.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가 처음으로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 후 일제 탄압에도 1930년대 후반까지 굽힘없이 투쟁했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주도하에 치러졌다. 1947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대회 때는 30만 군중이 서울 남산에 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전평이 와해되면서 1948년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노동절 행사는 정치권력과 자본가들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관변행사로 전락해 버렸다. 행사를 주관한 단체는 어용 대한노총(한국노총 전신)이었다. 1958년 이승만의 지시로 대한노총은 노동절을 자신들의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로 바꿔 버렸다.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노동절’의 이름마저 빼앗아 버렸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개미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근로자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은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남긴 오욕의 산물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 땅의 노동자들은 오랜 굴욕의 세월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1988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5만 명의 노동자가 모여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989년 4월 30일 마침내 '세계노동절 100회 기념 한국노동자대회'를 서울 연세대에서 개최하면서 한국 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5년 뒤(1994년), 우리 노동자들은 자신의 날을 되찾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올가미를 씌운 ‘근로자의 날’이란 꼬리표는 아직도 떼지 못했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상징하는 세계 노동절을 기념한지도 벌써 11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세계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세계의 노동현장은 얼마나 많이 자본과 기계 중심으로 굴러가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바뀌었을까?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는 <2004-2005 세계노동보고서>에서 끔찍한 사실을 밝혔다. 일자리를 갖고 있는 세계 노동자는 28억5천 명이며, 이 가운데 14억 명은 하루 2달러 이하를 벌고, 이 중 5억5천만 명은 하루 1달러도 못 벌고 있다고 보고했다. 2억 명은 실직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근래에는 전 세계 노동자가 30억 명으로 늘었지만 하루 2달러 이하를 벌고 있거나 실업노동자는 소폭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세계가 심각한 빈곤에 빠져들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난달 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자 30억 명중 18억 명이 저임금과 산업재해 위험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최악이다. 민주노총이 OECD가입 30개 국가와 주요 노동지표를 비교분석한 자료(2008. 10)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현실의 열악성과 자본의 착취와 억압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시직 비율 2위(30개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15개국), 성별임금격차 1위(20개국), 연간노동시간 1위(27개국), 인구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수 1위(28개국), 상대적 빈곤율 6위(27개국),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지출 비중 24위(24개국), 노동조합 조직율 29위(30개국), 비준한 국제노동협약 개수 28위(30개국), 임금단협 적용율 25위(30개국)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노동불평등의 극단을 달리면서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노동 불평등 세계 1위 국가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마치 기업의 성장과 투자만이 살 길이라는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책만 열심히 쏟아내고 있다. 경제위기 해법으로 비정규직 확대와 최저임금 삭감을 들고 나올 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흐트러진 뇌구조를 의심했어야 했다.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생활임금을 보장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비정규직 악법은 폐기하고 최저임금법 개악은 즉시 멈춰야 한다. 노동자의 눈물로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시키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다.

 

세계 노동절, “1%의 특권층만을 품고 99%의 국민대중은 나 몰라라 하는 MB정권의 1% 부자공화국에서, 희망은커녕 숨 쉬고 산다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진 노동자 서민의 마음”을 모아 개최한 ‘제119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범국민대회’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전 세계 노동자 민중들의 연대로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를 무너뜨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노동해방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수구골통의 본산이 대구 지역에서도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몸부림치는 행사가 있었다. 민족해방 운동의 불씨를 올린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국채보상공원에서 집회를 시작해 재래시장의 상징인 칠성시장에 가서 마무리 집회를 했다. 시장의 상인들과 같이한 ‘세계노동자의 날’ 행사였다. 지역 주민들과 같이하는 노동운동의 단초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