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세계 노동절 ‘모든 일은 1886년 5월 1일’에 시작되었다.

녹색세상 2009. 5. 2. 03:35
 

시카고의 둘째 날 거리에는 온통 눈부신 햇빛이 넘실거렸다. 시카고 외곽의 오크파크(Oak Park)에서 멀지 않은 포레스트 공원의 발트하임 묘지에는 햇빛이 화사했고 작은 숲 속에서는 새들이 조잘거렸다. 그 어느 한 구석에 1886년 5월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의 시위와 폭탄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네 명의 노동자들이 잠자고 있다. 묘지의 기념비 앞에는 동상이 서 있다. 한 사내가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고 그 앞에 여인이 오른팔을 치켜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서 있다. 여인의 오른손은 사내의 머리 위에 뻗쳐 있는데 손에 든 것은 아마도 월계관이다. 쓰러진 사내는 예수를 앞에 선 여인은 마리아를 연상시킨다.

 

 

모든 일은 1886년 5월1일에 시작되었다. 미국-캐나다 노동조합연맹(FOTLU)과 국제노동자협회(IWPA)가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총파업일로 결정한 이 날 미 전역에서 파업이 시작되었고 시카고에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8만여 명의 파업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다. 5월3일 매코믹 농기계 회사 근처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노동자 4명이 목숨을 잃었다. 5월4일 저녁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는 항의집회가 예고되었다. 이 날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광장에 모였지만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군중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3백여 명이 남아 수레 위에 선 어거스트 스파이스(August Spies)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 경찰이 수레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폭탄이 터졌고 경찰의 총구 또한 즉시 불을 뿜었다. 최소한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확인할 수 없는 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폭탄이 폭발하면서 7명의 경찰 또한 목숨을 잃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8명의 노동자가 체포되었다. 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증거도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파슨스(Albert Parsons)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한 명에게는 15년형이 선고되었다. 항의 시위와 탄원이 빗발치면서 이 중 두 명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5명 중 하나였던 링(Louis Lingg)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날인 1887년 11월11일 사형을 언도받은 파슨스와 스파이스, 피셔(Adolf Fischer) 그리고 엥겔(George Engel)은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교수대로 끌려가는 동안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불렀고 스파이스는 교수대에 매달리기 전에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의 목을 조르는 당신들의 명령보다 강해질 날이 올 것이다.”


이 말은 헤이마트 순교자 묘지의 묘비 기단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한편 파슨스는 사형이 언도되기 전 최후진술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원했다면 자본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도 원치 않는다. 그것이 내가 이 길을 가는 이유이며 또한 그것이 나의 유일한 죄이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총회는 5월1일을 국제노동절로 정했고 이듬해인 1890년 5월1일 세계 곳곳에서 8시간 노동 쟁취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집회가 열렸다. 스파이스의 마지막 외침처럼 목 졸려 침묵이 된 함성은 더 큰 외침으로 태어났다. 헤이마켓은 메이데이(Mayday), 국제노동절의 유래이자 상징이 되었다. 오늘 발트하임 묘지의 헤이마켓 순교자 묘지는 120년 전의 일을 따사로운 햇살과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한 구석의 1997년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동판에는 마지막 문구인 ‘미국의 역사(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누군가 ‘미국의 반대파 탄압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다. 그 옆의 아나키즘(Anarchism) 마크가 흐릿하다.

 

 

시카고 헤이마켓의 정신을 기려 유래한 5월1일의 국제노동절이 정작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의 첫째 일요일이라는 뜬금없는 날이 되어 단지 ‘쉬는 날’이 되어 있는 것은 미국의 어제와 오늘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미국의 역사란 멕시코시티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미국 시카고의 헤이마켓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시카고의 학교에서 아이들은 헤이마켓이 갖는 의미에 대해 가르침은커녕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는 역설이다. 그런 미국에서 5월1일은 ‘법의 날’로 지정되어 말뚝이 박혀 있고 오랫동안 같은 날 다른 나라에서 기념되는 노동절을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쯤으로 각인시켜 왔다. 이걸 미국을 지배하는 자들의 역사에 대한 야만성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발트하임 묘지의 헤이마켓 순교자 묘지는 따가운 햇살과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깊은 침묵 속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고적하다. 심상하게 잠들어 있는 것은 68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묘비 앞에 두 번 반을 절하고 일어섰다. 여러 죽음들이 떠올라 괜스레 눈시울이 무겁다. 터덜터덜 걸어 차를 세운 곳으로 돌아와서 시카고 도심의 헤이마켓 광장을 찾았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헤이마켓 광장이었던 곳이다. 헤이마켓의 비극을 둘러싼 계급간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폭탄 사건은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데에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다. 1889년 5월4일 헤이마켓 광장에는 손을 치켜든 경찰의 동상이 세워졌다. 헤이마트에서 진압을 지휘했던 지휘자였다. 기단의 동판에는 ‘국민의 이름으로 평화를 명령한다.’는 문구가 적혔다.

 


번화한 광장에서 이 동상은 쉴 새 없이 모욕을 받았고 결국은 헤이마켓 광장을 떠나 유니온 파크로 옮겨졌다. 1927년 5월4일 유니온 파크의 동상은 자동차의 돌진으로 땅으로 고꾸라지는 일을 겪었다. 1958년 동상은 다시 헤이마켓 광장으로 돌아왔지만 1968년을 곱게 넘기지 못했다. 검은 페인트가 칠해졌고 이듬해 10월5일에는 다리 사이에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1970년 5월4일 동상은 다시 세워졌다. 10월5일 첫 번째보다 더욱 강력한 폭탄이 동상을 다시 날려버렸다. 급기야 동상은 시카고경찰국 로비로 옮겨졌는데 폭탄테러를 우려한 끝에 1976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경찰대학 중앙홀로 몸을 숨겨야 했다. ‘국민의 이름으로 평화를 명령한다.’는 동상은 국민이 볼 수 없는 그곳에서 지금도 세월을 보내고 있다.


경찰의 동상이 사라진 헤이마켓의 광장에는 2004년에야 최초로 노동자들을 묘사한 기념상이 세워졌다. 시카고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이 기념상은 30만 달러를 들였고 시카고 미술가인 메리 브로저(Mary Brogger)의 작품이다. 사건 당시 수레 위에서 연설을 했던 스파이스를 모티브로 한 이 기념상은 콘크리트 기단 위에 수레와 수레를 떠받들거나 지탱하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손을 들고 연설하고 있는 스파이스와 동료들을 상징주의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도식적인 구도, 점토를 무성의하게 뭉쳐놓은 듯한 무기력한 인물들. 이념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인 대사건에 대한 어떤 열의와 진지함도 느껴지지 않는 관광지의 기념상이었다. 발트하임의 묘지에서부터 집요하게 따라온 슬픈 감정이 불현 듯 분노로 바뀌었다.


그날 저녁 웹사이트를 뒤져 찾은 메리 브로저의 이력과 작품은 누구라도 헤이마켓 기념상을 제작하는 데에 그녀가 부적절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패션, 실내장식, 건물, 의자 디자인으로 가득 찬 브로저의 아트워크 중에서 헤이마켓 기념상은 마치 괴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더불어 발견한 시카고 퍼블릭 라디오의 브로저 인터뷰는 여전히 남아 있던 분노를 서글픔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날 저녁의 폭력적인 사태를 묘사하는 대신 수레 위에서의 연설 장면을 모티프로 했지요. 그게 이성적이니까요.”


이성적인 기념상. 이것이 메리 브로저의 헤이마켓 기념상의 예술정신이다. 어떤 종류의 이성인지는 부연할 필요도 없겠으나 피 흘린 노동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노동자들의 압박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익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자신들의 곳간을 열 생각이 전혀 없다.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한 자본의 이익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게 일본의 ‘악몽의 10년’이 증명해 주고 있다. 평생 고용 대신 연봉제로 전환해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시작한 기업은 대부분 부도가 났으나 고용을 보장한 기업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자신의 밥줄을 책임지지 않는 기업에 충성할 노동자들은 아무도 없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게 우리 사회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