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어느 앞산꼭지의 자전거 타는 서러움

녹색세상 2009. 4. 29. 12:38
 

앞산터널 저지 달비골 ‘나무 위 농성’을 하면서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장기간의 농성으로 다리에 힘이 별로 없어 걷는 것부터 시작해 근력을 키워 몇 일 전부터 자전거를 다시 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탄지 오래되어서인지 그리 어색하지 않고 바로 적응이 되었다. 신비하게도 우리 몸은 예전의 상태를 기억하고 그 자리를 찾아간다. 운동을 하던 사람이 몇 년 하지 않아도 몇 개월 정도만 몸 풀면 시작한지 6개월 정도 되는 사람보다 근육도 좋고 빨리 적응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경험으로 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충돌방지를 위한 후미등과 전조등을 아직 달지 않았고, 눈에 잘 뜨이도록 야광조끼도 입지 않고 안전모도 착용하지 않은 채 간 크게 타고 다닌다. 아마 이 사실을 주위에서 안 다면 놀랄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자전거 타는 서러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걸핏하면 경음기를 울려대는 자동차의 횡포와 버스나 트럭  같은 대형차의 매연은 숨 쉬는 것 조차 거북하게 한다. 몇 달 동안 넣어 놓았던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니 매연은 조금 피할 수 있으나 ‘내가 빨리 가야 하니 너 비켜라’며 울려대는 경음기 소리는 상대적인 약자를 짓밟는 것 같아 서럽기 그지없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이런저런 구경도 할 수 있어 좋은 장면이 있으면 바로 사진기를 꺼내 찍기도 하는 등 이점이 많다. 남자인 내가 이렇게 차별받는데 여성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다. ‘여자가 어디’라는 덜 떨어진 인간들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린다.


어제는 7호 광장에 볼일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갔다. 가끔 가는 곳인데 지하주차장도 제법 넓어 주차하기는 좋으나 자전거를 세워 놓을 곳은 안 보인다. 그냥 세워 두면 또 도둑 당할 것 같아 이중으로 시건장치를 하고 한 쪽 구석에 세우는데 그 곳을 차가 막아 버렸다. 할 수 없이 그 옆에 세워두고 일을 보고 나오니 또 다른 차가 막고 있는 게 아닌가? 화가 나긴 했지만 이런 일로 싸우다 보면 수시로 싸울 수 밖에 없어 어지간하면 그냥 피하고 만다. 비장애인인 내가 이런 서러움을 당하고 사는데 장애인들의 경우는 더 하다. 건축법상 일정 면적 이상의 건물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도록 되어 있으나 ‘눈 가리고 아웅’으로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물을 지을 때 장애인들에게 한 마디 조언만 받으면 될 일을 우린 하지 않는다. 곳곳에 있는 장애물로 이동이 불편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아래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회 역시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 가를 보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도심의 환경오염이 공장의 매연인 시절인 이미 지나간 옛날이다. 자동차가 뿜어내는 배기가스는 도심의 공기를 혼탁하게 해 사람을 못 살게 한다. 그러려면 자동차를 덜 다니게 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 대중교통망을 확보하고 자전거를 안심하고 타고 다닐 수 있도록 전용도로를 만들고, 곳곳에 자전거를 세울 수 있도록 시설도 만들어야 한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그냥 일 할 수 없으니 간이 샤워 시설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자전거타기 운동’을 떠들어 봐야 백년하청이다. 상대적인 약자인 자전거 이용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서러움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명박아 범일아’ 자전거 안심하고 타고 다니도록 제발 도와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