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시골 샌님이 바라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종교의 구라.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에 잊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전직 대통령이 바위에서 떨어져 자살한 전대미문의 일이다. 이 일도 일이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 너무도 판이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다. 한 쪽에선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고 말했고, 또 다른 한 쪽에선 “비리 연루 전직 대통령, 자살에 성자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김동길 교수)”라고 말했다. 한 쪽에선 “그의 유서에도 국민과 대한민국이란 단어가 없고 오직 측근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측근을 살리기 위해 장렬히 몸을 던지는 조폭의 보스나 다름없는 사고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한 푼의 세금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변희재)”라고 말했다.
한편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 시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거지 나사로의 죽음을 상징한다(뉴스앤조이)”라고 말했다. 한 곳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청소년들의 모방 자살을 부추길 것이다. 감당할 능력이나 자질이 없으면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김진홍 목사)”고 말했고, 또 다른 한 곳에선 “현직대통령이 전직대통령 괴롭혀 죽게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인가”라고 말했다. 두 개의 입장에선 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 듯 보인다. 이때 이념과 좌우의 입장 차이를 떠나서 사실로만 말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현직에 있으면서 받았던(가족이 받았던 자신이 직접 받았던) 돈이 뇌물이냐 아니냐를 두고 검찰의 조사가 있었다.
조사 받는 과정에서 검찰은 대가성 있는 뇌물이라는 확증을 잡지도 못한 상황에서 조사 과정을 언론에 흘렸고, 국민들은 전 대통령을 비리를 저지른 파렴치한 인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직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수세에 몰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전직 대통령이 바위에서 자살했다고 본다. 죽음에 대한 의문은 계속 증폭되고 있다. 이 사건은 어쨌든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그 권좌에서 물러난 후, 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생긴 불행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세조와 단종을 떠올렸다.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ㆍ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 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ㆍ권람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김문기ㆍ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은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정적으로부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2월 24일에 영월에서 단종은 죽었다.
권력을 말할 때 약방 감초 같은 명제가 있다.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직까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언제나 권력의 바구니엔 용서와 화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권력이 질투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고, 형이 동생을 죽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뿐만 아니라 한 때의 권력가들이 권력에서 물러나면 입버릇처럼 말해지는 것도 비슷했다.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통령을 해서 얻어지는 명예와 권력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필수적인 것은 없더라. 대통령 자리가 보람은 있었지만, 행복하지는 않더라”라고 고백했다.
대통령을 해보지 않은 우리 같은 범인들로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그래도 권력을 누리던 그 때가 행복했다”라고 말하는 이가 많이 나올 법도 한데 현실을 그렇지 못했나 보다. 권력, 그것은 번번이 우리에게 행복과 번영과 안전을 약속한다. “나를 따르기만 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공약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좋은 세상을 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할뿐더러 권좌에 있는 사람들조차 좋은 세상을 누리지 못하게 했나 싶다. 뿐만 아니라 권력은 늘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일에 발이 빨랐다.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이나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을 품는 법이 별로 없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은 다시 권력에 도전 하지 못하게 필히 없애야 하고,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은 권력에 도전 하지 못하게 필히 눌러주어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을 만들어 왔다. 종교도 이와 흡사하다. 권력과 종교는 많은 점에서 닮았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는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한다. 자신과 다른 세계를 좀처럼 인정하기 힘들다. 권력에서는 자신과 다르면 반역자, 종교에서는 자신과 다르면 이단자가 된다. 권력이 강화된 사회에선 화해가 자리 잡기가 힘들다.
종교가 강화된 사회에선 용서가 자리 잡기가 힘들다. 종교와 권력은 ‘구라’라는 한 점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지금도 ‘종교와 권력’은 독점욕이라는 아주 미묘한 ‘구라’의 한 정 점에서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다. 종교가 강화된 사회가 용서와 화해가 충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종교가 강화된 사회일수록 더 교조적이고 권위적이고 권력적이다. 2천 년 전 예수의 죽음이 그랬고, 이슬람 사회의 명예살인이 그랬고, 신구교의 종교대립으로 인한 대량 학살이 그랬고,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그랬다.
권력이든 종교든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강화시키며 발전시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결코 공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소수의 특권 엘리트가 그 달콤함을 차지하고 나눠가진다. 민주국가는 항상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만, 대중은 늘 이 구라에 늘 속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걸 깨닫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우러름을 받는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알라의 백성이 되는 세상”을 광고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 적은 역사상에 단 한 번도 없다. 사실 지구별 전체는 고사하고, 해당 종교 내에서 조차 이런 세상은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종교와 권력은 모두 중앙집권적이고, 절대화를 추구하고, 소수에게 특권이 있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는 권력적이고, 모든 권력은 종교적”이다. 절대 권력자는 항상 신성화 되어 신처럼 떠받들어진다. 그리고 특정한 종교의 교조들은 절대적인 존재로,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진다. 모든 좋은 어드밴티지는 상위 소수 층에게 주어지는 것은 공식이다. 종교나 권력이나 모두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종교와 권력에 도전한 ‘겁 없는 청년’이 2천 년 전에 있다. 바로 예수다. 그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의료행위를 일부러 종교지도자가 보는 앞에서 행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고,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며 그 시대의 불문율인 성전을 조롱했으며 일부러 싸움을 걸었다. 사람보다 종교가 우위에 있는 것을 고치라고 말했던 청년 예수. 미미한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신에게 한 것이라며 뭔가 거꾸로 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청년예수. 그도 역시 당시의 최고 권력인 유대종교지도자와 헤롯왕의 단합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권력에 도전하고, 종교에 도전하는 자에겐 에누리가 없었다. 그것은 카스텔리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그는 칼뱅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칼뱅의 폭력성과 잔인무도함을 당시의 세상에 알리다가 쓸쓸하게 죽어간 사람이다.
그는 칼뱅을 최후의 순간까지 반대하며, 감옥살이와 천대를 받았다. 그를 기리는 독일의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폭력에 대항한 양심(1998년 자작나무 출판)’이라는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책에 의하면 칼뱅이 만든 신의 도시 제네바에서 통치 기간 최초 5년 동안에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의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예수살렘(제네바)’에 있는 감방마다 죄수들로 가득 찼다고 보고하고 있다. 단지 칼뱅이 만든 종교적 법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교조인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권력형 종교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했던 그들의 교조에 비해 역사 속의 기독교가 얼마나 권력적이었던가. 예수의 후손들은 자꾸만 ‘예수’를 잊어버린다.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곤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다.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 세상의 모든 종교 집단의 딜레마이다. 어쩌면 이 지구별의 숙제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 있는가?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가?”라는 숙제 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권력을 위해 있는가? 권력이 사람을 위해 있는가?”도. 이렇듯 인류의 모든 시대에서 권력의 구라는 목숨을 빼앗고, 종교의 구라는 영혼을 훔쳐왔다.
권력의 구라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을 자살하게 만들었고, 종교의 구라는 사람을 죽이고 유린하고도 감사하게 만들었다. 권력의 이름이라면, 종교의 이름이라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도 권력도 ‘구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종교란 이름으로 포장한 권력은 더 파렴치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이름을 갖다 붙여 구라를 넘어 사람까지 정죄한다. 권력이 저지르는 구라보다 더 악랄하고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불거토피아 인용)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의 흉터를 보고 웃지 말자. (0) | 2009.06.28 |
---|---|
앞산에서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인간의 평범한 이야기 (0) | 2009.06.25 |
행복을 위한 보험을 듭시다. (0) | 2009.05.02 |
어느 앞산꼭지의 자전거 타는 서러움 (0) | 2009.04.29 |
죽음으로 내 몰리는 기초생활수급권자들 (0) | 2009.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