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남의 흉터를 보고 웃지 말자.

녹색세상 2009. 6. 28. 23:59
 

책을 읽다가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흉터를 보고 웃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살아오며 굴곡을 많이 겪은 탓인지 남의 일 같지 않아 바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경험해 봐야 안다’는 말이 맞는 가 봅니다. 보름 전 (고등학교 때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는) 캐나다에 가서 산지 15년이 넘은 친구로부터 누리편지가 왔습니다. 직업이 목사라 그런지 ‘잘 지내느냐’는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설교가 날아 와 화가 나 바로 반박을 하려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낸 정성’인데 싶어 몇 일 고민을 했습니다. 

 

 

 

멀리 나가 산지 오래되어 오해할 것 같아 에둘러 답장을 보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2차 설교를 보내니 목사 특유의 ‘직업병’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려니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우울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을 했습니다.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앓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특수한 상황에 들어가면 공포감을 느끼는 공황장애도 같이 앓았습니다. 증상이 가벼울 경우 동시에 오지 않으나 ‘심할 경우 같이 와 환자는 고생한다’고 정신과 의사와  상당심리를 연구하는 친구로 부터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 큰 불편을 느끼지 않으나 특정한 사안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어 놀라곤 합니다. ‘내공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라며 자책감에 빠질 때도 있는데 주치의사는 ‘경미한 후유증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노출이 잦을 경우 악화될 우려가 있으니 피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정신과 질환을 앓거나 마음의 병을 이해하는 폭이 좁은 우리 사회 현실은 그 상처를 병으로 보지 않고 ‘지극히 개인의 탓’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2차 가해로 새로운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의료체계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이런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리치료와 정신과 치료를 구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거머쥐고 있는 밥그릇을 놓으려 하지 않는 탓이 매우 큽니다. 그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가 낳은 희생자들이 늘린 게 우리 현실입니다.

 


간접 경험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아픔을 잘 모르는 게 사실이죠. 고생 하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어떤 이는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합니다. 세상에 마음 크고 넓게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잘 되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 버리는 순간 그 개인이 설 곳은 없어지고 차가운 조직의 논리만 작동하고 맙니다. 그런 모임에는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냉랭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파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고 그냥 두면 됩니다.

 

흉터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아픈데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뭐 그런 걸 갖고 그러느냐’고 한다면 새로운 상처를 덧붙이는 격이 되고 말죠. 흔히 진보운동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일에 밀려 남을 껴안고 이해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한 경우를 봅니다. 오직 일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삭막함을 보는 것 같아 더 힘들더군요. 무엇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일의 중심에 사람을 놓고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논리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소중함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문제지요.

 

남들이 피하는 힘든 길을 오래도록 가면서 받은 온갖 상처를 털어내지 않고 묻어 두기만 하다 보니 큰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더러 봅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다치다 보니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아 보호 본능이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지 않고 ‘투쟁의 의지가 없고 나약하다’는 쪽으로 몰아붙이는 이상한 풍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남자가 울면 안 된다’는 해괴망측한 궤변이 한 몫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하면 되련만 눈물을 보이면 약한 사람으로 보는 이상한 시선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야 말로 불행하기 그지없는 일이건만 눈물 흘리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남성 우월주의가 아직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나의 논리와 생각이 분명할수록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너그러움이 필요하죠.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우린 동지라고 부릅니다. 정말 동지라면 원칙을 분명히 하되 상대의 아픔을 껴안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 방치하면 사소한 일로 서로 앙금이 생겨 엉뚱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록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