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죽음으로 내 몰리는 기초생활수급권자들

녹색세상 2009. 4. 23. 12:55

엉성하기 그지없는 기초생활보장 제도


생활능력이 없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사업을 하다 파산하거나 실직이 장기화 되어 당장 끼니를 걱정하며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산재사고나 교통사고 등으로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봐서는 멀쩡하나 속병이 있거나 사고후유증으로 만성통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인 이웃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국가가 최소한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며 만든 것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다. 그런데 혜택을 받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까발려야 하는 수모를 당해야 한다. 아무리 낡아도 배기량 2천씨씨 차가 있거나 찌그러져 가는 초가삼간 한 채라도 있으면 이미 예선 탈락이다.

 

 

재산에 대한 실사는 세금을 먹일 때 하는 정부 고시가가 아닌 현 시세로 판단하게 되어 있는 아주 치밀한(?) 제도가 ‘기초생활보장법’이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나와 비슷한 연배의 중년 남성이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지정받도록 도움을 준 일이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이런 법이 있는데 신청해 보라’는 말과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 것 말고는 별로 없다. 혹여 국가가 모든 걸 책임져 주는 줄 환상을 갖고 있을까봐 실상이 어떤지 알려주었더니 ‘역시나 대한민국’이라고 하기에 서로 겸연쩍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겹친 사고로 노동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다 막판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도움을 최후 방편으로 택한 사람이다.


의료보장도 받지 못하는 기초생활수급권자들


먹고 살기 힘드니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집세를 못 내어 명도 소송에 패소해 거리로 나오기 일보직전에 처한 ‘노숙의 길목’에 내몰린 사람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생활비 25만원에 동절기 난방이 2만원을 지원한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이 있고 먹고 살 음식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냥 25만원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너 얼른 사라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난방이 2만원은 가스값은 커녕 연탄 살 돈도 되지 않음에도 ‘난방지원비’라고 하니 너무 웃긴다. 시골이라도 힘든데 대도시에서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게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복지 수준이다. 노무현 정권 때 조금 나아진 게 이 정도니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사회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건강보험급여에 해당하는 항목이라도 의료를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병원에 가면 최소 1천원에 약값 5백원은 들어야 한다. 몸이 성할리 만무한 사람에게 진료비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중병이 들거나 하면 ‘긴급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큰 병에 들기 전에 평소에 책임지지 않으니 자신의 건강을 돌 볼 여유가 전혀 없다. 기초생활수급권자 가운데 ‘조건부 수급권자’는 기초생활 수급권 자격을 유지하지만 관할 구청에서 지정한 자활후견기관에 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 집세 내고 각종 생활비 빼고도 남는 게 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만성통증에 시달려 진통제 4~5알을 달고 사는 사람을 대한민국은 장애인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산재사고와 교통사고, 기초생활보장법의 장애 분류가 제 각각인데다 통증은 장애 분류에 아예 없다. 이 정도 지경에 처해 있는데 삶의 의지가 있고 ‘난 재기한다’는 ‘의지의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저히 견딜 방법이 없어 하나 뿐인 목숨을 스스로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은 외면한 채 ‘죽을 용기 있으면 살아라’는 말을 사정없이 던지는 것은 또 다른 폭력임에 분명하다. 작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 후 노숙인 쉼터가 가득 차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효율성을 높이려면 사람을 버리지 마라


하루하루의 삶이 살얼음판인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리 큰 게 아니다. 최소한의 주거공간과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고 병든 몸 치료만이라도 해 달라는 것 뿐이다. 만성통증 환자 중 근골격계질환의 대부분은 재활치료만 받으면 통증에서 해방되어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재활의학과와 통증전문의사들은 말한다. 문제는 재활치료와 심한 통증치료가 건강보험급여 대상이 아니라 돈 없는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데 있다. 재활의학과 의사들은 재활치료를 ‘급여대상’으로 넣어 하루라도 빨리 ‘현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그 놈의 돈 타령만 해대고 있다. 북서유럽의 경우 교통사고나 산재사고를 당한 사람이 재활치료를 받지 않으면 자동차보험 가입도 회피할 정도로 재활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싱싱하고 젊어도 초보자 보다 적당한 삶의 연륜이 있는 숙련공을 재활 치료해 현업에 복귀시키는 게 더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을 말하는 철저한 자본주의 방식이지 사회주의 제도가 결코 아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웃들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급증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현업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살아가던 작은 사업을 하던 사장이고 숙련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잠시 경제가 어렵다고 그들을 일회용품 취급을 한다면 국가 전체로 봐도 엄청난 손해다. 사람을 쉽게 버리는 사회가 결코 건강할리 만무하고, 그 사회의 효율성이나 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1월 20일 발생한 서울 용산 참사는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다시 말해 빈민이 급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벼랑 끝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모진 목숨을 그냥 끊을 수 없기에 최악의 선택을 한다면 개인도 불행하고 우리 사회 역시 불행하다.


온 국토를 삽질해대는 헛발질 제발 그만하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한민국 고위 공무원 중 3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 자신 있는 놈 있으면 나와 봐라? 살아보고 나서 사회복지병을 들먹이던지 말든지 해라. ‘가난은 불편할 뿐이 아니라 서럽기 그지없는 냉엄한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내몰지 마라. 살고 싶지 죽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 용산의 철거민들도 “살고 싶어서 망루에 올라갔지 죽으려 올라간 게 아니다.”는 유족들의 말을 들어라. 사람 죽이는 천박한 사회에 산다는 것은 산지옥일 뿐이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처럼 가난에 내몰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생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진: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