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자본과 권력에 피 빨리는 멍청한 대학생들

녹색세상 2009. 4. 28. 17:04
 

“스펙 쌓아봐야 헛일, 노동절 투쟁에 적극 동참하라”

 

요즘 대학생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불쌍하다’와 ‘멍청하다’ 정도다. 연상되는 단어는 ‘스펙 쌓기’와 ‘학자금 대출’, ‘실업’ 등이다. 과거에 대학생하면 떠오르는 것은 ‘데모’, ‘운동권’이었다. 그땐 대학생이 불쌍하거나 멍청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반대로 대단하거나 무섭다는 느낌이 강하기도 했다. 기성세대도 절대로 대학생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요즘의 ‘중고딩’은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와 달리 대학생이 불쌍하기는 하되 ‘멍청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이 성인이기 때문이다. 다 큰 성인으로서 고등교육을 받는 지성인으로서의 지성과 책임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죽을 길로 가고 있는 사상 최악의 멍청한 집단이다.

 

 

2007년 대통령선거 때와 2008년 총선 시기에 등록금 문제를 갖고 강력하게 싸우지 않고 무관심 하게 넘기다가 지금 와서 하고 있다. 하는 것을 욕하는 게 아니라 정세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싸움은 그 시기가 있기 마련이고 시기를 놓치면 고생은 실컷 하고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대통령 선거나 총선 때 여의도에 모여 열흘 정도만 싸웠더라면 지금과 같은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작년 촛불이 대한민국 전역을 밝힐 때 과연 몇 대학이 동맹 휴학을 하고 거리로 나와 ‘우리의 살 길’을 외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거리에는 머리 허연 4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10대들이 나와서 촛불을 들었지 곧 사회로 나갈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나온 걸 보지 못했다.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거리로 나와 경찰의 폭력을 막았다면 이명박 정권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대학생, 사상 최악의 멍청한 집단


곧 있으면 다시 노동절인데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극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하고는 없다. 김영삼 정부 이래 한국 사회는 ‘노동계급 파괴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고용유연화로 파괴하고 성과급 경쟁체제로 파괴해 버렸다. 반노조 정서는 집요하게 노동 계급을 공격했고 이제 노동조합의 위상은 땅바닥을 지나 지하를 향해 파들어 가고 있다. 대학생들은 미래의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늘나라의 신선처럼 전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했다. 노동이 공격받는 것은 대학생의 미래가 공격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이 위축되면 대학생의 미래도 같이 위축된다. 하지만 그들은 반노조 정서에 동참하며 현실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심지어 상당수 학생들은 우경화의 길을 자초하기까지 했다.

 

▲ 한대련, 한총련, 대학생 다함께 등 전국대학생행동준비위원회는 27일 오전 청와대 입구인 청운동사무소앞에서 ‘전국대학생 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5월 1일부터 1박 2일간 서울 도심에서 ‘등록금 인하’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것이라 밝혔다. (사진:오마이뉴스)


그 알량한 서열의식에 젖어 본교 학생은 분교 학생을 능멸하고, 수도권 학생은 지방대 학생을 능멸하며 대학서열체제에 가담했다. 같은 지방대끼리도 학생들 사이에 차별이 있을 정도다. 또 전국의 대학생이 총 단결해 ‘고등교육 국립 무상화’를 요구하는 소요사태를 일으키지도 못했다. 그 결과 위축된 노동에 의해 대학생의 미래는 암울해졌고, 심화된 대학서열체제 때문에 절대 다수 대학생은 삼류대의 낙인을 피할 수 없으며, 등록금 지옥 속에서 부채 인생을 살아가는 처지가 됐다. ‘현재는 부채요 미래는 실업’이 한국 대학생의 모습인데 이들은 스펙 쌓기로 이 장벽을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미련함이다.


노동유연화 등으로 전체 노동의 몫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땀 흘려봐야 헛일이다. 게다가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등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대학생들이 노조를 욕하면 욕할수록 안정된 노동을 지키는 힘이 줄어들어 결국 자신들의 미래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 재벌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생각도 멍청하기는 매 한가지다. 1990년대 이후 대기업은 수익이 늘어나는 것과 상관없이 일자리를 줄여왔다. 일자리를 늘인 건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의 광포한 포식성은 중소기업을 압박해 결국 한국의 일자리를 줄이며 쥐어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과 그 정치세력에게 희망을 걸었던 대학생들은 정말 멍청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과거의 대학생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약자들과 연대했으며, 문제를 국가 정치의 차원에서 풀려고 했다. 현재의 대학생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끊고 약자에 무관심하며, 문제를 학내 복지나 스펙 쌓기로 풀려고 한다. 그렇게 대학생들이 민중과 정치로부터 멀어지자 한국사회가 우경화된 것은 물론이요 대학생 자신들도 비참해졌다. 최근 엄청나게 치솟은 등록금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는지를 나타낸다. 학생들의 반발이 무서웠으면 절대로 그렇게 등록금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며, 학자금 대출의 금리도 그렇게 높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스펙 쌓기에 열 올리며 정치적으로 우경화한 대학생들을 한국사회는 호구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대학생들은 자기 인생을 저당 잡히며 알바를 하고, 몸을 팔고, 자살까지 해가면서 번 돈을 상납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한 마디로 빨대 꽂힌 인생이다.


집단적으로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세대의 필연


이들이 사회로 진입해서도 여전히 빨대 꽂힌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인턴 등의 명목으로 중노동 저임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기업의 수익 극대화, 노동비용 극소화를 위해 ‘몸빵’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집단적으로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세대의 필연이다. 만만하게 보이니 결국 먹힌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희망도 없다. 추세의 역전은 대학생이 다시 전국적으로 뭉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뭉쳐서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별 스펙 쌓기는 모두가 죽을 길로 가는 것이고, 노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모두의 미래에 밝기 그지없는 고속도로를 까는 일이다.


청년대학생들은 재벌 세력이 아닌 노동과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에 가담해야 한다. 그래야 평생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우는 아이 젖 주듯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절규하지 않으면 자본과 권력은 거들떠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가 사정없이 짓밟아 버린다. 대학생이 집단적으로 무시 못 할 힘을 휘두르면 등록금 따위의 소소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자신들의 물적 토대가 뒤흔들리는 것보다 등록금이나 무상 교육 같은 것을 내 놓는 게 오히려 이익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는 기성세대인 부모들의 ‘내 자식’ 중심의 이기주의와 오직 점수만 잘 따면 모든 걸 용서하는 잘못된 풍조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이제 성인이니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해결하고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곧 닥칠 노동절은 절대로 노동자와 노조 등 ‘그들만의 날’이 아니다. 농업 국가였을 땐 농부가 천하의 대본이었으나 지금은 노동자가 천하의 대본이며 모든 청년 대학생의 미래다. 한국이 현재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것은 바로 이 ‘천하의 대본’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본이 흔들린 이유는 학생들을 비롯해 사회 전체가 노동을 가벼이 여기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노동절을 맞아 대학생들의 노동의식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설사 이명박 정부를 제지하는 데 성공해 노무현 정부식으로 민주적 제도를 지키는 나라가 되더라도 청년들의 등엔 여전히 빨대가 꽂혀 있지 다른 것이 기다리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처럼 작은 것에 목을 매다가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세상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기성세대들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레디앙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