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다리 앞산꼭지의 넋두리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진짜 사랑

희랍의 저항시인 네르크라소프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자는 ××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 치하에 신음하던 자신의 조국 그리스의 현실을 너무 안타까워했기에 그는 슬퍼도 하고 권력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성서를 가장 먼저 기록한 바울은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의 완성이지만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명토박은 것으로 바울 신학의 진수라고 합니다. 앞산터널 반대 투쟁과 관련해 사랑은 ‘터널저지 농성’을 하는데 벽돌 한 장이라도 쌓았느냐, 아니면 훈수나 두고 김 빼는 소리 해대지는 않았는지 극명하게 보이니 그리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12월 14일 농성을 시작하자 누군가 “앞으로 타격방향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라며 난수표처럼 해독이 어려운 말로 거품무는 걸 봤습니다. 누가 들으면 ‘저 사람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나 내공없는 어슬픈 것들이 마약 먹은 것 처럼 자아도취에 빠져 그런 소리나 해대죠. 우리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조직이 빵빵해 대구시를 타격한단 말입니까? 전형적인 직업운동꾼들의 ‘뻥치기’지요. 그 후에라도 농성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으면 그는 앞산문제와 관련해 ‘사랑한 사람’이지만 다른데 가서 ‘지는 싸움 왜 하느냐’며 초 치는 소리 하고 돌아다녔다면 아님에 분명합니다.

 

앞산꼭지들 중 농성과 관련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해 냉엄하게 비판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잘못을 빌어야 하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앞산을 지키기 위해 서로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이라 굳이 문제 제기하지 않았지만, 평가할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명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분명히 실명비판을 할 것 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벌목 저지 싸움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기자회견을 하니 슬슬 나타나 훈수를 두기 시작하는 선수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 선수들의 눈에는 무모한 싸움을 하는 앞산꼭지들이 지도의 대상으로 보이는지 함께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교만 하려 드니 웃기는 일이지요. ‘벌목 저지 싸움에 제대로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멀리서 인사만 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상수리나무 위에 있는 걸 봤는데 미안해서 그냥 갔다’는 순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잔머리 굴리지 않는 그들을 ‘동지’라고 부르지만 아무리 옆에 있다고 해서  그리 부를 순 없습니다.

 

앞산꼭지 한 분이 2월 20일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철새인 기러기떼의 생존을 위한 비행 동영상을 올린 걸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올린 분 특유의 넉넉함과 푸근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만 우리와 ‘방향이 틀리고 아닌 것을 맞다’고 하는 사람조차 보듬어 안고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산꼭지들의 정성으로 이어 온 ‘나무 위 농성’

 

앞산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 마지막 저항 수단으로 달비골 초입 18미터 높이 가량 되는 상수리나무 위에 앞산꼭지들과 앞산을 아끼는 많은 분들의 정성을 모아 작은 성을 지었습니다. 흔히 농성을 하면 ‘고공농성’이라며 뻥을 너무 많이 치는지라 거부감을 줄이고 누가 들어도 친근감 있도록 ‘나무 위 농성’이라 이름을 지었지요. (기자 만나면 수시로 ‘고공농성’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더군요.) 이런저런 정성을 모아 ‘나무 위 농성’을 시작한지 90일 가까이 되었습니다. 

 

 

칼바람 몰아치는 북풍한설에 농성을 할 수 있을 지, 골 들머리라 바람이 세차게 불어 체감 온도가 많이 떨어지는데 몸이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을 했으나 추위에 몸이 적응을 하면서 별 탈 없이 넘겨왔습니다. 시간만 나면 농성장으로 와서 ‘필요한 것은 없는지, 몸은 괜찮은지 걱정하는 마음’이 모였기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90일 가운데 제가 ‘나무 위 농성’을 70여 일 정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주치의사인 후배가 가까이 있었습니다.

 

선배가 추운데 고생한다고 기능성 등산복도 챙겨 주고 수시로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 전화도 해 주니 누구보다 조건이 좋아 아주 편하기 때문이죠. 찾아와서 위로와 함께 걱정해 주는 많은 분들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걱정해 주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 한 자락 역시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처음 3주 농성을 하다 발에 가벼운 동상이 걸렸지만 빨리 치료해 별 다른 고생은 없었습니다. 2월 24일부터 태영건설이 일방적으로 벌목을 작업을 하다 주민들이 예상 밖으로 강력히 저항하자 놀란 기색이 역력하죠.

 

벌목 작업이 순탄치 못하자 급기야 용역경비라는 용병을 투입해 무리하게 벌목을 강행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에 나무 위의 생활 역시 살얼음판의 연속입니다. 아주머니 한 분의 얼굴이 체인톱에 찢어져 50바늘이나 꿰매고, 용병들에게 폭력에 밀려 실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는 의사들이 있는 ‘내가 누워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라는 생각을 수시로 합니다.

 

 

쉽게 해서도 안 되지만 쉽게할 수 없는 용서는 피해자의 몫

정확히 10년 전 1999년 5월 13일 11시 20분 무렵,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대구-포항 고속도로 제5공구 현장 대구방향 8번 교각에서 남의 일이었던 산재 사고가 제게도 오고야 말았습니다. (숫자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만은 기억합니다.) 정말 운 좋게 손가락 관절을 1센티미터 피해가는 바람에 손가락 장애는 피했지만 복합골절에다 인대 파열과 신경 손상으로 장기 투병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산재 사고 7번에 각종 사고 4번에 수술대에 3번 올랐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그렇게 사고가 겹치다 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공황장애, 우울증’도 앓게 되었습니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남들에게라도 폭력을 휘두른 자가 근처에 있으면 쳐다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 가능하면 그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그렇게 몸 하나 지탱하는 것도 버거운 처지에 아무런 연락 한 번 없이 ‘재판에 의한 이혼’이란 일을 당하고 보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갔더니 ‘소송하면 승소는 하지만 얻는 게 뭐냐’면서 포기하라고 해 그냥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에 목사인 아이 이모부에게 ‘앞길이 수 천만리 같은 어린 생명들의 장래가 달린 일이니 한 번만 나서 달라’고 수 차례 사정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 나갈 정도로 신앙이 돈독하다는 아이들 외가를 찾아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모든 것 다 접고 눈물로 호소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집은 증조부 때부터 백부까지 3대가 두 집 살림을 해 집안 문제 해결 못 하면 인간 취급 못 받는다.”며 제 생애 처음으로 무릎 꿇고 “비록 제 피는 안 섞였지만 아들은 제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고, 둘은 서로 남매니 아이들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기회를 주시라”며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모든 것 접고 애걸복걸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이야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자식들의 장래가 걸린 문제라 ‘살인과 도둑질’을 제외한 그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외면당하고 보니 눈 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로 인해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몸은 점점 약해져 가고, 몸이 받쳐주지 않으니 견디는 게 더 힘이 들 수 밖에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모 대학에서 상담 심리를 강의하는 친구의 “억지로라도 용서해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못 견딘다”는 권유에 따라 생애 두 번째로 ‘용서’란 걸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얼굴은 커녕 전화 한 번 없었던 아이들 외가에 대한 분노가 어느 날 ‘측은하고 불쌍한 사람들’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편해졌습니다. 결혼 후 살았던 성당주공아파트 근처만 가도 눈물이 쏟아졌는데 그 동네로 이사가 살아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만 잊어 버리고 용서하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용서란 뼈를 깎는 아픈 경험을 한 저로서는 의아하기만 합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고 치가 떨리는 과정을 그쳐야만 가능한 ‘용서를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죠.

 

 윤희용 저 인간에게 걸리면 죽는다?

 

전혀 길이 없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곰곰이 돌이켜 보면서 제 옆에 천사들이 늘려있었는데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것은 따로 오는 게 아니라 같이 온다’는 어느 어르신의 말씀이 딱 맞더군요. 이런 저를 두고 “윤희용 저 인간한테 걸리면 죽는다”는 소문이 자자한 게 사실입니다. 사람 죽인 일도 없고 누군가를 상대로 문제 제기를 해도 늘 퇴로를 열어 놓고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은 간데없고 ‘별종’으로 찍어 버리더군요.

 

물론 제 수양의 부족으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게 있을 줄 압니다. 아무리 진보정당이라지만 남들 눈치 보고 분위기 봐가며 말하기 마련인데 혼자라도 할 말은 하니 눈 밖에 나겠지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야속할 뿐이죠. 달리 표현하면 진보의 탈을 쓴 ‘패거리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죠. 다른 것은 몰라도 약자를 괴롭힌 것만은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정리 했지만 이제 나이가 있는 탓인지 몇 번을 머뭇거리며 기회를 줄 정도로 잔머리를 굴리는 저를 되돌아보며 반성을 하곤 합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조직에서 제소장을 쓰기도 하고, 민감한 사안을 건드려 익명의 댓글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별나게 군다’고 입방아를 찧지만 제기한 문제나 제소 내용이 허위라면 자살골인데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자살 골 먹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리 셈에 둔하지 않을 정도로 사기꾼들이 판치는 건설업계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직업군인을 좋아하지 않듯이 ‘직업운동꾼’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세상 물정이라곤 쥐뿔도 모르면서 자기 손으로 노동을 하지 않고, 말로만 변혁 운운하면서 냉엄하기 그지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달려 보지 않은 그들이야 말로 온실 속의 화초지요. 물론 그 중에도 진솔한 사람이 있지만 어느 날 나타나 정세 분석에다 훈수나 두는 인간들이 많아 먼저 옥석을 구분합니다. 이제 긴 넋두리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하고 필요할 때 몸으로 때우는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지만, 어려운 말만 골라서 지껄이고 난수표보다 더 해독하기 어려워 말본에도 맞지 않는 글로 때우는 인간들을 믿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죠. 이런 속내도 모르고 ‘누구와 어떻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난감하죠. 사정 모르면 그냥 가만히 두는 게 도와주는데 한마디씩 보태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어느 날 가슴에 피멍이 든다는 것을 모르더군요. 내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는지 수시로 성찰을 하곤 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아도 아닌 것에 저항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 앞산터널 저지 싸움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 발로 먼저 내려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앞산꼭지들의 합의에 따라 정리하지 혼자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하면서 함께 하겠습니다. 앞산을 지키는 것은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에 뜻을 같이하는 앞산꼭지들과 같이 할 것입니다. 용서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외경에 있는 구절을 사족으로 달면서 지루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원수를 믿지 말아라. (집회서 12:10~11)

“원수를 절대로 믿지 말아라. 그는 쇠가 녹슬듯이 더욱 악해질 것이다. 비록 네 원수가 겸손하게 굴고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너는 몸을 사리고 그를 경계하여라. 거울을 닦듯이 원수를 대하여라. 원수의 정체는 끝내 드러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