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김수환 추기경이 과연 민족의 나침반이었는가?

녹색세상 2009. 2. 17. 15:35
 

고인이지만 개인이 아닌 공인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을 바로 비판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더구나 한국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기에 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어 밤을 지새우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성역은 없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글을 쓰며, 제가 지금 처한 특수한 환경 때문에 자료가 빈약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김수환이란 이름은 개인이 아닌 종교지도자이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공인이요 한국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란 중책을 맡은 사람이니 일반인들과 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더 냉엄한 평가와 비판을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제 종형 한 분이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계시면 쉰여덟이니 그 시절에 일류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왔으니 잘 나갔지요. 선산에 묻히기 전 집 근처에서 노제를 지냈는데 “남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하더니 자식이 먼저 죽는 험한 꼴 본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가까이 사시는 작은 고모는 피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업어서 키운 조카의 죽음 앞에 마냥 눈물만 나올 뿐인데 ‘안 됐다’는 말은 없고 ‘자식 먼저 죽는 험한 꼴 본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수 밖에 없지요. 개인에게도 그런데 한국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마냥 애도만 할 게 아니라 공과에 대한 냉엄한 평가와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입니다. 칠순의 어느 추모객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그 분의 말씀은 우리 민족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며 애도 하셨는데 과연 그랬는지 차분히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주교의 부일 행위에 대한 비판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복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민족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의인에 대한 명예회복은 커녕 지난 날 더럽히고 짓밟은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일제 치하 한국천주교회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사참배란 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무자비한 탄압이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린 잘 압니다. 

 


당시 주교였던 노기남은 앞장서서 일제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국천주교의 역사의식의 한계와 수준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임에 분명합니다.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독재가 판을 칠 때 권력을 향해 비판하는 것은 목숨을 내 놓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함석헌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 같은 분들을 우린 존경합니다. 김수환 서울교구장도 목소리를 내긴 했으나 ‘목숨을 건 쓴 소리를 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생각합니다.

 

추기경 건드릴 독재자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쿠데타라는 원죄가 있는 다까끼 마사오에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물러나라”는 말 대신,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까지 애정을 쏟은 분”이라고 하며 “3선 개헌에 대한 욕망을 꺾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국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상식 이하의 회고담을 늘어놓았으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충분히 엿 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까끼 마사오 넌 대통령 자격이 없다”면서 끝까지 하야를 외친 장준하 선생님과 너무 비교됩니다. 1987년 6월 16일 6월 항쟁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청년학생들을 끌어내기 위해 경찰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본다. 그 다음 같이 농성 중인 사제들을 보고, 그 뒤에는 수녀들이 있고, 연행하려는 청년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다. 나부터 먼저 밟고 지나가라.”고 하셨지요.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행동이지만 그 정도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천주교회는 신자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사제라면 어려움에 처한 젊은 여성과 함께 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같이 넘어 온 문규현 신부님처럼 행동해야지 권력과 적절히 거래나 하는 것은 모리배들이나 하는 짓거리임에 분명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몬 한국천주교의 양심은 어디로?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교구장으로 있을 때는 그래도 한국천주교는 체면치레는 했으나 어느 날 이상해졌지요. 노인이 된 추기경이 하도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추기경이 언론에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났다.”며 한참 후배인 호인수 신부로부터 호되게 비판받은 적이 있습니다. 2002년 카톨릭중앙의료원 파업 당시 경찰 병력 투입을 요청했을 때 원로인 김수환 추기경이 무엇을 했는지, 이랜드 노동자들이 갈 곳이 없어 미리 협조 공문까지 보내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피눈물로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 천막을 찢어버리는 폭력을 묵인했는지 냉정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천주교서울대교구가 경영하는 가톨릭대학 부설 중앙의료원 산하의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병원 로비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신부가 동원한 용역깡패들로부터 폭력도 당하고, 법원으로부터 출입 금지가처분 판결을 받았다.

 

중앙집권식의 천주교 권력 구조 상 아무리 은퇴했다 할지라도 그의 말 한 마디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음을 삼척동자도 압니다. “김수환이 한 게 아니고 정진석이 한 걸 왜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안다면 결코 그렇게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어 “추운 겨울에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지 마라”는 한 마디 정도만 했다면 정진석 추기경이나 서울교구의 실세들이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작년에 있었던 강남성모병원에 용역깡패를 동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개 몰듯이 차 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난 분에게 어떻게 그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느냐’며 책망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비판 각오하고 제 이름을 걸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평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정의구현 사제단의 신부들이 안팎으로 얼마나 시달리는지 조금은 압니다.

 

거대 권력인 삼성재벌에 맞서서 싸운 김용철이란 사람의 내부 고발은 사제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집안 일의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그 집의 속은 곪아 썩어 들어가 죽음의 길 말고는 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인 김수환이 아닌 천주교서울교구장을 지낸 한국천주교의 상징인 추기경 김수환에 대한 평가를 명확히 해야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비난이 아닌 비판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약 중독자처럼 서서히 죽음의 길로 달려갈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오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한 하느님의 명령에 귀 기울이는 것 만이 교회와 예수를 따르겠다는 자들이 할 일입니다. 천주교 내부에서 추기경 김수환의 잘잘못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비판이 있기를 기다립니다.  연쇄살인범을 악용해 ‘용산철거민들의 죽음을 물 타기’ 하려 했듯이 지금의 추모 분위기는 이명박 정권의 ‘화려한 휴가’인 용산학살에 대한 여론 조작의 냄새가 물씬 나기 때문에 매우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글에 대한 펌질 대환영이며 출처만 살짝 밝히면 고맙지요. ^^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추 신: 민족문제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뒤 44년 초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 학병으로 징집됐다. 이후 일본군 동부 22부대에 입대해 도쿄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일본 패전 뒤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46년 12월 귀국했다.”고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44년 1월 시행된 학병제는 명색은 지원제였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이었으며 사관후보생도 장교 부족 사태로 인해 일제가 차출한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기에 제가 올린 글의 내용 중 ‘친일행위’와 관련해 정정을 합니다.

 

저는 기독교(개신교)신자이고 실명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사람의 죽음이 모든 것을 덮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신구교할 것 없이) 한국교회가 시대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비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지금 제가 처한 환경이 자료가 빈약한 상태에서 글을 썼으니 내용이 투박하고 거친 것이 있을 줄 압니다. 애정 어린 지적과 비판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단 욕설은 사양하겠습니다. 주소는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성서우체국 사서함4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