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성폭력사건에 민주노총이 진짜로 밝혀야 할 의혹

녹색세상 2009. 2. 13. 21:45
 

성폭력 사태, 근본적인 접근 필요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민주노총 성폭력 사태에 대해, 지도부가 책임을 통감하며 전원 사퇴했지만 민주노총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아주 멀고 험난해 보입니다. 2월 11일 민주노총은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가해자가 바로 사과를 하고 ‘잘못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강조하고 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조직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번 사건을 둘러싼 몇 가지 의혹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A씨의 집을 위원장의 도피처로 삼은 경위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실제로 많은 여성조합원들이 궁금해 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촛불집회와 관련한 이석행 위원장의 수배에 따른 도피과정’이라는 중요하고 긴급한 순간에 A씨의 집을 은신처로 삼기로 한 건은 누구의 의견이고, 어떤 정황 속에서 무엇이 가장 큰 이유로 참작되었는지, 거기부터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A씨 측이 밝힌 바에 의하면 같은 연맹 소속 조합원인 B씨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석행 위원장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다고 합니다. A씨가 평소 이석행 위원장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이거나, 위원장이 직접적으로 요청을 할 만한 관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원장이나 중앙간부들에겐 수많은 지인들이 있을 텐데, 굳이 B라는 중간매개 인물을 통해 A씨에게 은신처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혹시 여성조합원이 남성조합원보다 위원장을 더 잘 보살펴줄 것이라는 ‘성별 역할’을 계산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보았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가 A씨를 노동운동의 주체이자 동지로서 대했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여성보다 같은 남성의 집에 피해 있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고 좋다고 보는데 굳이 여성의 집을 피신처로 삼았는지 의문입니다.

 

위원장을 숨겨주는 것은 사실상 범인도피로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공무원 신분인 A씨에겐 큰 희생이 따를 수 있는 요청입니다. 이석행 위원장이 검거될 수 있다는 점과, 그 이후에 A씨가 감당하게 될 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고려가 있었는지, 사전에 A씨에게 얼마나 정보를 제공했는지 여부도 중요합니다. 이는 조직이 조합원들에게 무엇을 얼 만큼 요구하며, 어떤 선택권을 주는가의 방식과 관련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둘째, 이석행 위원장 검거 이후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A씨에게 경찰에 불려갔을 때 허위진술을 하도록 요구한 점에 관한 것입니다.


‘강요’냐 ‘논의’였냐 서로가 다르게 진술하고 있지만, 민주노총 측이 거짓으로 진술을 하도록 종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B씨의 부탁을 받아서가 아니라, 집 앞에 위원장 등이 와있었다고 거짓 진술하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신분에 엄청난 불이익이 올 수 밖에 없는 일을 그리 단순하게 결정할 사람은 드문 게 사실 아닙니까? 이에 대해 민주노총 측은 9일 기자회견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오해가 있을 수 있었다며 “A씨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였던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당사자가 가장 잘 알 것입니다. 이처럼 A씨와 민주노총 간부들이 판단을 달리 했을 때, 민주노총 간부들은 A씨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았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A씨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민주노총의 기자회견문에서, 그 태도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로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들먹였을 뿐 성인지적 관점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셋째, 가해자 김씨의 성폭력 행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이석행 위원장이 A씨의 자택에서 검거된 바로 다음 날, 대책을 논의하자며 만난 김씨는 귀가한 A씨의 집에 침입해 성추행하고 강간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고 합니다. 성폭력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범죄이고, 가해자들은 여러 의도에서 범행을 저지릅니다.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성폭력을 행하기도 하고, 분풀이로 가해하기도 하며, 입막음을 하거나 자기 수하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적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이번 사건은 여러 정황을 통해볼 적에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됩니다. 마치 군사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힌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휘둘러 자백을 받아 내거나 다시는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공안기관이 하는 파렴치한 짓거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위원장이 검거된 바로 다음 날이라는 정황도 그렇고, A씨를 설득하고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A씨로 하여금 조직을 순순히 믿고 따르도록 회유하는 임무를 띤 가해자 김씨가 어떻게 그 와중에 자신이 설득해야 할 대상인 A씨에게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정치인의 이른바 ‘정치적 스킨십’의 실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의 여성단체장 성추행 사건을 통해, 선거를 앞두고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여성단체의 대표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추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진 적이 있었습니다.

 

또 작년에 보도된 ‘스포츠 성폭력의 실태’에서도 감독(교사)이 학생들을 자기 선수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성폭행을 가하고, 감독교사들끼리 ‘가르치는 수단의 일환’으로 성폭력의 방법을 사용해볼 것을 권하는 얘기도 서슴지 않는 것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성에게 성폭력을 휘둘러 자신과 특별한 관계로 만들고, 무력하게 만들어 순순히 따르도록 하려는 의도임에 명백합니다. 이는 ‘이상한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스킨십’이란 한국의 가부장적인 정치문화 속에 자리잡은 것이고, 스포츠 지도자들의 성폭력 역시 감독들 사이에 공유하고 전수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는 성폭력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제도적인 문제까지 아울러 봐야 합니다.

 

성폭력 범죄와 사건은폐의 배경이 된 조직문화


필요할 땐 갈급하게 요청하며 헌신을 요구하고, 공무원 신분이 위협받는 희생을 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지로서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으며, 위원장 검거 이후 대책을 이야기하고 조직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만난 당일, 집으로 찾아가 성폭력을 휘둘렀던 민주노총 간부의 범죄행위는 여성을 철저히 비하하고 동등한 주체로서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혹은 도구로 바라보는 조직문화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도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감시를 하거나 조직을 생각하라고 압력을 넣는 일이 가능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해주지 않는 조직, 도움을 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조직, 동지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조직, 중앙간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조직, 이렇게 먼저 신뢰를 저버린 조직에 대해 A씨가 믿음을 가져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의문은 비단 A씨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이 사건을 통해 갖게 된 의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민주노총은 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이 벌어졌을 때 해결하는 가장 좋고 빠른 것은 문제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잘못에 대해 피해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입니다. 감추고 은폐하는 것은 피해를 당해 가슴앓이 하고 있는 사람에게 2차 피해를 고스란히 안겨 준다는 것은 인권 이전에 상식임을 알지 않으면 문제 해결은 요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