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뒤에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소음이 들려왔지요. 백미러로 뒤를 보니 망가진 승용차 한대가 도로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멀어지면서 그 차는 점점 작게 보이다가 결국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차와 부딪혔을지 모르는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한 순간 부딪혔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 갑자기 내게 고통이 닥쳐왔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가한 오후에 고통이 닥쳐왔을 사고당사자를 생각하다가, 결국 그도 언젠가 고통을 피해간 저의 기억에서 잊혀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매일 쏟아져 나오는 누군가의 불행에 관한 소식
매 순간 이렇게 누군가는 고통을 피해가고, 누군가는 마치 운명인 마냥 고통에 맞닥뜨려야 하겠지요. 피해간 자도, 마주한 자도 결국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누군가는 고통을 겪느냐에 대한 질문은 신도 답해주지 않습니다. 헌데 인간이 어찌 답하겠습니까. 멀어지는 사고차량을 보면서 요즘 언론매체를 대하면서 들었던 유사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매일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에 관한 보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교통사고나, 범죄, 자살(개인적이면서도 구조에서 기인했을 불행)에 관한 보도를 듣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목숨을 던진 비정규직 노조원의 투쟁소식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폭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민과 무력감과 두려움의 복잡한 감정에 마주서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용산에서 일어난 죽임과 죽음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통탄합니다. 카메라는 언제나 파괴당한 이들의 삶을 비춥니다.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사건들은 백미러를 통해 점차 멀어진 사고차량처럼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겪는 자와 겪지 않는 자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신의 묵묵부답을 잊은 채 말입니다.
분명 카메라는 힘없는 자들을 비추고 있건만 변화는 몹시도 더뎌 보입니다. 고통을 의식적인 기억으로부터 억압해 버리는 사람들의 생존본능 때문일까요. 아니면 언론이, 혹은 사회가 고통을 어떻게 비추고 어떻게 편집해 버리는지가 문제일지요. 개개인은 고통을 의식 밑으로 억압하는 방식으로 고통에 방어하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고통은 불거져 나옵니다. 그러니 사회가 인간의 방어체계를 닮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통을 억압하는 개인의 기제를 넘어, 사회는 되짚고 기억하고 복구하는 방식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이 만연하여 곪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투쟁와중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용산의 거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생을 위협당하고 있었다고, 저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훨씬 이전에 죽임을 당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과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있었건만 우리 인식에서 빗겨서 있었을 뿐이지요. 매 순간 누군가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은 사람들의 생리적 각성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주 과격할 때에야, 언론매체를 통해 먼 곳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 걸까요.
전 세계의 분쟁 지역이 ‘여행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나라 베스트 10’이라는 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어떤 블로그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쟁지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여 ‘여행’가서는 안될 곳, 내지는 미개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지요. 피부색과 언어, 종교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고 뉴스 속 ‘영화 같은’ 세상일 뿐입니다. 저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폭력이 한창일 당시 “히틀러가 이해될 만도 하지요?”하고 거친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낯선 폭력적인 시각자료가 제시하는 단편적 정보에 이렇듯 허튼 단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희생자의 죽음이 스너프물이 되지 않으려면
폭력에 관한 뉴스는 감정을 자극시킵니다. 사람들은 마치 극장에 가서 ‘쏘우’ 시리즈를 보듯이 감각을 자극하는 범죄스토리에 흥미를 느낍니다. 혹은, 피해자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피해자 비난으로 흘러가기 일쑤입니다. 전쟁터의 희생자들이 스너프물(실제 살인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에 두 번 죽임을 당했던 일은, 어느 원시시대의 일이거나 사람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분쟁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분쟁지역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던 소위 민주화되고 개발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지요. 배부르고 따뜻한 곳에 살고 있다면, 본의 아니게 스너프 필름의 옹호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범죄자를 욕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요. 가려진 고통을 가시화하고 지원을 보내는 일은 분명 필요합니다. 허튼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과 달리, 또 어떤 사람들은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분쟁지역의 폭력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기도 하고 지원금을 모으기도 합니다. 사건보도를 위해 뉴스에서 고통을 알리는 일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커먼 사진기들이 몰아 닥쳐 플래시를 쏘아대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전시된 고통이 당사자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심장병에 걸린 작은 소녀가 얼마나 예쁜지, 그럼에도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은 지갑을 열어 후원을 합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초라한 밥상에서 맛없게 밥 먹는 모습을 방송에서 보여주면 후원금을 얻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카메라를 바라보지 못했던 그 집 아이가 다음날 학교에 어떻게 갈 수 있었을까 저는 아직도 궁금합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그 아이를 보여줌으로써 후원금을 모으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아이가 부끄럽지 않게 해주는 것일까요. 가난하다고 식권을 타먹는 것이 다른 아이들에게 알려지면서 인생이 한스러웠다고, 치료 장면에 찾아온 한 아이가 이야기하던걸요.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식권이 아니라 자기 존중감을 키워줄 수 있는 따뜻한 교육환경이었을 테고, 그 부모가 일하고 정당히 대우받을 수 있는 직업 환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폭력의 현장을 전시하는 일은, 때로 자기 편을 정당화하고 자기 권력을 주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폭력의 희생양은 더하여 이데올로기와 관념의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살해당한 사람의 사진이 어떤 사람들의 관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악용되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막가는 개발과 용역깡패 문제가 이 시기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만, 이제라도 부각된 점이 다행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알력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하는 건지요. 삶의 터전을 지키려다 목숨을 빼앗긴 사람, 혹은 명령에 복종하다가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또 생기지 않도록, 폭력의 가시화가 희생자 전시나 정치적 놀음에 그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당사자의 ‘날 것의 목소리’와 오래 접촉하기
‘깨어있음’과 ‘접촉’이라는 심리치료 개념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자신의 감각, 행동, 감정, 자신이 지닌 소망이나 가치에 대해 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전하는 고통을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깨어있음’, 즉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극적인 시각적 전시물에 반응하는 생리적 각성상태나 감정적 반응에 머물러있지 말고, 그 각성을 알아차리고 신중한 생각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폭력이나 공격성과 같은 본능적인(인간 안의 즉각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은 생각이라는 좋은 벗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려면 눈 가리기 식 왜곡된 편파보도나 자극적인 보도로부터 벗어나 전후 맥락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할 터이며, 통시적인 사고능력도 필요합니다. 저널은 단지 처참한 현장을 시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폭력의 현장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도 알려주고, 어떻게 도울 방안이 있는지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접촉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당사자와의 접촉을 말입니다. 심리치료에서 접촉이란 고통에 똑같이 매몰되거나 자신을 잃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대응하거나 회피하지 않은 채, 당사자를 존중하고 그에 진심으로 공감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치료나 심리진단 현장에서 결코 제 3자의 말이나 치료자 멋대로 결론짓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뢰되는 것은 ‘날 것의 자료’라고 하는 즉, 당사자가 직접 한 말과 당사자와의 상호작용입니다.
그런데 지식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당사자와 대화조차 하지 않은 채 펜대를 굴려 이러니저러니 말을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삶의 현장에서 항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지식인들이 자기 관념에 따라 당사자들을 외면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똑똑한 분들이지만 그분들이 간과한 것은 접촉의 힘입니다.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치유라는 이슈가 한창 달궈지는 오늘날 상황에서도, 깨어있음과 접촉을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치료하는 사람, 치료받는 대상으로 갈라지는 서구 의학의 이분법이 치유에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문제는 인식되지 않고 있으며, 치료자라고 하는 사람은 열의가 강해 단 한 번의 프로그램으로 변화가 일어나기를 몹시도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는 접촉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정치적 열의로 치료프로그램을 이슈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치유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 생존자의 ‘날 것의 목소리’를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당사자가 영웅이나 투사가 되기를 원하면서, 또 다른 방관의 길로 들어서려 합니다. 당사자가 영웅이 되는데 필요한 심리적 힘은 안전한 환경이 침해 받지 않고 보장되며, 고통의 역사를 사회가 인정하고 이에 사죄하는 데서 옵니다.
그러니 고통을 겪은 자가 영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기보다는 사회가 거듭나기를 바라야겠지요. 깨어있음과 접촉을 잃지 않은 채 지금 용산에 있는 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사회가 이를 보장해야 합니다. 위협이 없는 삶의 터전과, 최소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삭 힐 시간과 애도할 공간은 있어야 하건만, 여전히 화재가 누구 탓에 일어났는지 밀어내고 정치적 기회를 엿볼까 급급한 상황입니다. 이 끔찍한 사회를 다시 한 번 믿어주도록 사회는 사죄하고 터전을 돌려드리는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주의 일다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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