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일박이일 휴가를 받았다. 앞산꼭지 중 가장 젊은 조인재 꼭지와 교대를 하고 집으로 갔다. 일단 밀린 빨래부터 하는 게 돌아온 싱글이 남들에게 추하지 않게 보이는 방법이다. 탈수를 해 놓고 빨리 마르라고 건조대를 방으로 옮겨 늘어놓았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어 조용히 빠져 나왔다. 자식 하는 일이 못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냥 져 주기만 하시는 부모님들. 예전에는 어렵게 사는 조카나 질부들에게 늘 주면서 살아오신 어른이 그러지 못해 속이 많이 상해 계신다. 어디가도 밥값 먼저 내야 마음 편하고, 막걸리 한 잔 사던 분이 그러지 못하니 그 심정이 오죽하실까 싶다. 형편이 넉넉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애와 질부는 요새 우예 지낸다 카더노’라며 고생하는 질부들과 종손자 종손녀 걱정이 하루도 떠나지 않는다.
어제는 달비골 우리 농성장을 지어준 건설노조 총회가 있어 이무용ㆍ하외숙 꼭지와 같이 인사를 하러 갔다. 조합원이 총회는 참석하지 않고 인사를 하러 가니 기분이 묘했다. 낯 익은 조합원들과 인사도 하고 축하하러 온 민주노총의 박배일 본부장을 비롯한 신임 집행부와 덕담도 나누었다. 우리 앞산꼭지들은 그냥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는데 사무국장이 ‘앞산꼭지들과 관련한 동영상이 나갔으니 한 말씀해야 한다’고 해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12월 13일 밤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고소 작업을 해 준 조합원들이 고맙기 그지없어 ‘잘 지어준 집에서 잘 지낸다’고 인사를 했다. “산골오지 현장을 돌아다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별로 걱정 하지 않지만 가끔 경험하는 사람들은 불안해한다.”고 하니 건설노동자들은 하나 같이 ‘다 안다’는 얼굴로 화답했다.
아는 게 병이라고 위험을 아는지라 안전장치 없이 야밤에 작업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것도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 추운 날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에 그들의 정성이 더 고맙기만 하다. 2006년 대구지역의 어지간한 큰 현장을 다 세운 총파업 투쟁 이후 조합원이 되었다. 그 전에는 관리자라 가입을 할 수 없어 파업 소식을 듣고 그냥 집회에만 나갔을 뿐 함께 하지 못했다. 2007년 총회에 처음 참석해 혼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저 인간 누구냐’고 확실히 찍혔지만 그래도 투쟁의 현장에 수시로 가곤 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마침 총무부장이 후배의 아내라 사무실 들락거리기가 편했다. 앞산터널 반대 싸움을 하면서 다시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좋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교대 약속한 시간이 되어 달비골로 향했다. 도착해 조인재 꼭지와 교대하고 보니 좋은 음악을 받아 놓았는데 역시 배우답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외박을 마치고 무사히 상수리나무 위로 올라오고 보니 여기가 내 집 같고 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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