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앞산에서 정월 초 이튿날 보내는 편지

녹색세상 2009. 1. 28. 22:58
 

어제는 설이었다. 아무리 어렵다 하지만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제사를 지낼 텐데 또 빠지고 말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는 게 우리네 인간사이기에 한 쪽을 버리지 않을 수 없어 달비골 입산을 택했다. 이제 이골이 난 어른들께는 덜 미안하지만 자식에게는 고개를 들기 어렵다. ‘내리 사랑’이라고 했듯이 자식 앞에는 꼼짝 못하는 게 부모 된 자의 심정이요 현실인 것 같다. 숙모나 삼촌이 잘 챙겨 주기에 조금은 편하지만 그래도 편치 않다. ‘하늘의 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해린이라 이름 지은 우리 딸, 밝은 해가 떠오르면 어두운 밤은 멀리 달아나듯이 이웃에게 밝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도를 늘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 것도 못 챙겨 고종 동생에게 빼앗기며 울기만 한 녀석이다. 사춘기를 넘기기 전까지 겁 많고 남들에게 맞고 들어와 부모님 속 많이 태운 애비처럼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었으니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온 몸으로 부딪치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남들처럼 뒷받침 해 주지 못하는 처지라 그저 가슴앓이만 할 수 밖에 없으니 더 미안하고 갑갑하다. 어릴 때 처럼 남들에게 양보하며 살아갔으면 좋으련만 우리네 현실이 그리 녹록치 못해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약자들을 괴롭히는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해야겠다. 나 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사는 게 속 편한 애비의 체험에 의한 고집인지 모르지만.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요즘 같은 세월에 그래도 발칙하게 불가능을 꿈꾸며 살아가고 싶다. ‘불가능을 꿈꾸지 않는 자는 가능한 것도 하지 못한다’는 남미의 생명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박사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은 것은 내가 달비골로 들어오면서 부터다. 지금까지 그냥 관념적으로만 느끼고 뱉어 낸 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구체적인 생명체를 보니 바로 가슴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나 같은 예수쟁이는 ‘하느님의 음성’이라 고백하기도 한다. 그저 구조적인 폭력에 분노하고 싸워왔을 뿐 생명체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부딪치기는 처음이다. 성서 처음 이야기인 창조 설화처럼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후 보기 좋았다’는 이 아름다운 곳을 파괴하려는 폭력을 두고 볼 수 없어 그냥 몸 부조를 한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이름 모를 뭇 생명들을 지키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