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용산 참사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녹색세상 2009. 1. 25. 20:34
 

용산 살인 사건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은평 뉴타운을 추진할 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는 많다. 용산지구 개발에서 ‘한국의 두바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던 용산의 국제 업무지구와 성매매 집결지 재개발에 관해서는 도시개발과 관련한 어지간한 전문가들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물론 정책적으로 제도 정비가 시급한 측면이 있고,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에 대해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정도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제도 개선과 정책 방향을 따지기에 앞서 이 사건은 살인 사건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본주의 내부에는 사적 소유권의 다툼이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정비하더라도 흐름에 따라서 폭발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에 죽은 6명의 귀한 영혼들이 최소한 안면을 취하게 되었거나 억울함이라도 풀리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제도적 개선’을 논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거민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근에는 사망 사건까지 가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원래 철거민 투쟁은 농민 투쟁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과격한 ‘경제 갈등’의 두 축이다. 농민과 도시빈민 두 집단 모두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고, 특히 세입 사업자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끝까지 몰린 사람들이다. 그냥 먹고 살만한 정도였는데, 정부나 개발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정말 아무 잘못 없이 순식간에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만다. 뉴타운과 같은 대규모 공영개발 사업이 20년에서 30년 동안 걸리게 되는 것은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이 바보이거나 비효율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것이 더 합리적이고 부당한 결정이나 사회적 부작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5년 내에 한다고 하는 이명박의 뉴타운 정책은 처음부터 이런 극한 투쟁을 낳을 수밖에 없는 틀이었다. 그 어떤 쪽으로 설명하더라도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분명한 살인이다. 본질을 따지자면 경제적 타당성과 경제 효율성 같은 고상한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1퍼센트 정도의 토호들과 땅 부자를 위한 토목 자본주의라는 경제형태, 그리고 결국 힘으로 대중들을 누르고 갈 수밖에 없는 정치형태로서의 경찰국가의 이해가 만난 지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다.

 


용산 개발 하나 하는데 벌써 6명이 죽었는데 뉴타운만 25개에 민간 부문을 포함하면 100개는 족히 넘을 재개발지구에서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전국적으로 50조원의 토목비용을 새로 투입한다는 데, 도대체 제대로 보상금도 지급되지 않은 수많은 세입자들이 얼마나 더 죽어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때마다 애매한 경찰들이 얼마나 더 죽고 다치겠는가? 전국적 재개발과 사회간접자본 사업의 집행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정권의 입장은 이해해도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살인사건이다.

 

이제 한미FTA가 국회 비준이 되면 사방이 캄캄한 농민을 비롯한 많은 약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보상을 위해서 움직이게 될 텐데, 본보기로 미리 몇 사람 죽인 것이 이 사건의 종합적 실체 아닌가? 어차피 방송과 언론이 경찰국가를 지지하는 마당에 사법부가 국민들을 지켜줄 이유도 없고, 존재감 없이 자리나 지키고 있다고 엄하게 경찰한테 얻어터지기나 하는 입법부가 국민을 지켜줄 것 같지도 않다. 경제 위기의 바닥을 거치면서,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경찰 작전 중 이런저런 이유로 죽게 될 텐데, 미리 몇 사람 본보기를 하는 것이 전체적인 사망을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할 말 없다.

 

아무리 남한 사회가 경찰국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그렇게 쉽게 하면 안 된다. 그건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가졌던 최소한의 예의이고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도 사람을 죽였다. 농민 몇 사람과 건설 노동자를 죽이고 나서 그는 임기 말년까지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민사회와 농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탄핵으로 힘을 찾은 전임자도 살인사건 이후에 인기를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정권을 내준 경험이 있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에는 미리 조정할 수 없는 경제적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제도정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변동된 상황에서 새로운 미비점이 드러나고, 그때마다 삶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제적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경찰들이 사람들을 죽였다면, 선진국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최소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겠는가? 한국 자본주의는 너무 급하게 달려오느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너무 정치를 못하느라고 경찰들 뒤에 숨게 되었고, 그래서 1년 만에 경찰국가로 한국이 전환된 것도 사실이다.

 

 

폭력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명분’과 ‘대의’를 말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경찰 진압봉과 물대포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정권이니 경찰국가 체계로 한국은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이지 말자. 아무리 때리지 말라고 해도 이미 피를 본 경찰이 국민이든 국회의원이든 가리지 않고 때릴 것이 분명할 테니 때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죽이지는 마라. 그건 이미 경찰국가로 바뀐 한국 자본주의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안전판이고,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여섯 명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제도 개선과 논란은 그 후에 해도 좋다. 먼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예의를 갖추지 못한 이런 나라가 21세기에 선진국이 된 사례는 없다. 피 맛을 본 경찰 지도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한국의 복잡한 공영개발 체계와 의사결정 과정 혹은 보상금 체계에 대해서 뭘 알겠나? 이미 피 맛을 본 경찰 지도부들이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가 미처 배우지 못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개념을 탑재하기 위해 일부 언론에게 부탁한다.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라고.


청와대에서 경제 내각 개편에 여념이 없고,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 피 맛마저 본 상황에서, 그들에게도 예의를 갖추라고 주문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어차피 대중들이 등 돌린 상황에서 경찰 데리고 자리라도 보존하는 것 외에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아마 세상이 하얗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다르지 않은가? 한국 사회가 살아야 당신들도 살고, 한국 자본주의가 다음 단계로 발전하고 개선되어야 당신들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부 언론에 진심으로 부탁하노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한국의 지배층은 40만 명, 경찰은 10만 명, 그리고 살기가 어려운 대중은 4천만 명이 넘는다. 대중들이 분노하면 10만 경찰로 못 막는다. 작년 광우병 정국처럼 방패로 찍히고 짓밟히면서도 오직 ‘비폭력’을 외쳤지만 변한 게 없다는 것을 학습한 수백만의 촛불들은 이제 최소한의 방어를 넘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될 경우 경찰은 밀리고 군대를 동원한다 해도 막을 수 없다. 경찰국가의 종말을 결국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자. 지금처럼 입방정 떨면 남미의 아르헨티나처럼 비행기 타고 도망가거나, 그리스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처럼 엄청난 사회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치 혀를 조심하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동영상: 칼라TV. 만평: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