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앞산달비골 상수리나무 위, 새해 첫날의 소식

녹색세상 2009. 1. 1. 16:55
 

어제는 ‘앞산 지키기’에 힘을 실어주러 부천에서 자전거로 오신 분이 농성장을 찾아왔습니다. 부산까지 가는 길에 ‘앞산터널 저지 싸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셨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지요. 중1인 후배의 아들과 같이 자전거 여행 중인데, 젊은 사람도 잘 하지 않는 자전거로 먼 거리를 온다는 게 대단하지요. 그렇지만 요즘 같이 ‘점수 따기’ 말고는 안 시키는 세월에 중학생을 저렇게 단련시키는 부모가 있으니 자식 교육 제대로 시킨다는 생각에 샘나도록 부럽더군요. 아무리 부모가 하라고 한들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못하는데, 아버지 선배를 따라 자전거로 이 겨울에 눈보라 맞아가며 먼 길을 달리는 그 아이도 참 기특하더군요. 부모가 본을 보이는 가정교육의 바탕이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믿습니다.

 

  ▲ 2880년 12월의 마지막 날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 농성장’ 헤드랜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켜야 하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을 우린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치열하다 못해 비정하기 그지없는 경쟁사회, 남한 사회 자본주의는 걸핏하면 ‘선진국 진입’을 들먹이면서도 사회 안전망이라고는 전무 하니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중심으로 흘러만 갑니다. 그런 속에서 ‘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핑계로 험한 사회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나를 발견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죽으려 하는 게 아니기에 나무랄 수는 없으나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사람 김수일 부부는 중2 딸을 생명탁발순례에 보내 ‘최연소 단원’으로 ‘전국구 10대’로 다니다 오게 배려했습니다. ‘학교 가기 싫다’는 자식의 뜻을 두고 1년 넘게 고민하다, ‘너 하고 싶은 것 하라’고 결정을 내렸으니 부모 또한 보통 아니지요. 아무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만 나 같으면 그렇게 할 자신이 없기에 더 부러운지 모릅니다.


새해 해돋이를 보러 달비골을 통해 산성산으로 새벽 찬 바람을 마다않고 밤길을 올라가는 사람들, 새해는 ‘지금보다는 좋으리라는 희망’ 하나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곳곳에서 인력 감축의 칼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의 악몽 보다 더 해 ‘바닥을 알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지 모를 일입니다. 자살률 세계 1위에 하루 3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더 죽어야 한다니 끔찍하기만 하지요.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민중들이 늘어만 갈 텐데 국가의 대책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 ‘앞산지키기’에 힘을 실어주러 부천에서 자전거로 오신 일행과 앞산꼭지들의 반가운 표정.

 

밤새도록 부는 골바람이 오늘 낮까지 멈출 줄 모르네요. 간밤에는 얼마나 추웠던지 천막 안 곳곳에 살얼음이 얼었더군요. 전기장판이 있는 곳은 따뜻하지만 그렇지 않는 곳은 아무리 방수가 잘 되는 천막이라 해도 한기가 스며들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1970년대 온돌에 바닥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고, 위는 차가워 자고나면 걸레가 얼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없이 살아도 서로 나눌 줄 알았는데 이젠 더 못 가져 안달이 난 세태, 생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각박한 세상인심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에 즉각 총 파업으로 대응한 언론노동자들이 이 추운 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칼바람이 부는 날 ‘48시간 행동’도 서슴지 않고 보여주면서 투쟁의 의지를 권력을 향해 보입니다. 진작 거리로 나와 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감히 방송장악 음모를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총 파업을 통해 ‘저 낮은 곳’의 체험을 많이 하고, 아픔이 있는 민중들의 한을 언론노동자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뭇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달비골, 분지인 대구에서 계절의 변화가 선명한 이 아름다운 곳을 마구 파헤치려는 자본과 권력의 탐욕스런 현장에 몸뚱아리 하나로 저항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이것을 ‘아름다운 저항’이라고 부르지만 그 곳 상수리나무 위에 있는 나로서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이렇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만 더 해 갑니다. 죽어나갈 생명들의 절규가 조금씩 들려와 가슴이 아파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생명들이 살 수 있도록 보살피고 환경을 보존하는 노력을 게을리 한 나 자신을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