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싸우지 못한 채 주어진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한민족의 광복을 가져왔다. 일본의 2차 대전 참전과 패전은 한일관계사나 동아시아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패전에 따른 한민족의 광복은 한민족을 세계사의 격류 속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일 투쟁을 부정하지 않지만 일본 패전에 대한 한민족의 공헌은 그리 큰 것이 못되었다. 유럽의 피점령국에서 있었던 파르티잔이나 레지스탕스 같은 저항도 한국 내에서는 거의 없었다. 국외에 근거를 둔 파르티잔부대 하나가 국경 곁의 마을 한 곳을 습격한 보천보사건(1937년 6월)으로 김일성이 일약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상황은 국내의 저항이 얼마나 미미한 상태였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이것이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깎아 볼 이유는 되지 못한다. 유럽에서도 저항이 강했던 것은 독립국으로 있다가 전쟁 중에 점령당한 나라들이었고, 점령 기간이 길어 지배국 치안체제가 확립된 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 배재대학교 재직 교수 및 재학생, 졸업생들이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그러나 점령 기간이 짧고 저항이 치열했던 나라가 당연히 독립국으로 인정된 데 비해 전쟁 전부터 지배당하고 있던 나라에 대한 대접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연합국의 한국 처리 방침은 자기네 이익과 편의에 맞추도록 되어 있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주요 연합국 중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중국은 자기 자신이 해방된 처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언권이 약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에 맡겨지게 되었다. 점령을 맡는다는 것은 건국 방향을 좌우할 칼자루를 쥐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1899년 필리핀 점령 이래 태평양 건너편에 대한 이해관계를 키우고 있었고, 소련은 태평양 진출을 갈망하던 러시아의 뒤를 이은 나라였다. 그러나 1945년 시점에서 두 나라의 야심은 이런 평면적 패권 확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축으로 한 세계 체제 구축이라는 각자의 입체적 구상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흠모의 대상
1945년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확장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의 독일에 대한 항전 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력이 성장했다.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서도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연계시킨 공산주의자들의 항전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 공산당에게 강한 영도력을 발휘했다. 최초의 공산국가로서 선발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봉쇄를 극복하면서 산업화를 수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독일 격파의 주역으로 떠오른 소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한국 역시 항일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역할이 크게 늘어나 있던 나라였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할 때 스탈린은 한국을 자신에게 종속적인 공산국가로 만들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김일성이었다. 한국 좌익 항일운동가 중 나이가 젊으면서 지명도가 높고 최근 4년간 소련에 의탁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자기네가 점령한 이북의 공산화를 순조롭게 진행하면서 이남 좌익 세력의 동조를 이끌어내려는 것이 소련의 전략이었다. 미국의 대응은 불리한 조건 아래 남한이라도 지켜내겠다는 방어적인 것이었다. 소련에 비해 미국의 가장 불리한 조건은 효과적인 협력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익에도 김구처럼 지명도가 높고 강한 영도력을 가진 인물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김구를 비롯한 우익 명사들은 미국이 바라는 만큼 협조적이 되기에 민족주의 성향이 너무 강했다. 예컨대 군정 당국자들은 일제하 치안에 종사했던 인력이 자기네 한국 장악에 얼마나 요긴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통파 우익은 이들 친일파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저명인사이면서도 유연성(?) 있는 인물인 이승만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처럼 유연성 있는, 즉 기회주의적인 인물이 틈새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6~7년 무렵의 몽양. (위에서 왼쪽) 1947년 7월 몽양 장례식에 모여든 군중. 보기 드문 애도 인파였다.(위에서 오른쪽) 유일하게 국내 조직을 갖고 해방에 대비한 뛰어난 정치인으로 군단위까지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치안을 확보할 정도였다.
민족주의는 통상 좌익보다 우익 성향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해방 당시까지 좌익 성향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던 원인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 해방이 하나의 혁명적 과제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량적 성향의 우익보다 혁명적 성향의 좌익이 이 과제의 수행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던 1930년대 상황이 한국 민족주의를 좌익 쪽으로 더욱 몰아붙였다. 한국의 보수적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1920년대에 일본의 자유주의파와 호응해 점진적 민족 발전에 희망을 품었다.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 정당정치가 퇴행하면서 이 희망의 발판이 사라졌다. 일본 군국주의가 비타협적 강권통치로 조선 경영에 나서면서 한국 민족주의도 비타협적 혁명운동으로 좁혀졌다.
해외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중국에서도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좌경화를 국민당 정권이 거들었다. 적극적 항일활동의 중심지 만주 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자라나 결국 괴뢰 만주국이 세워지는 것을 국민당 정부가 방관하는 동안 그 지역 항일운동에게는 공산당과의 연계가 유일한 활로가 되었다. 중국 자체의 민족주의가 공산당에 기울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한국 민족주의자들도 중국 공산당에 기대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보수적 민족주의의 거점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해방 당시 항일운동을 바탕으로 한 건국 영도력은 좌익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좌익 중에는 민족주의 운동을 위해 공산당에 의탁한 사람들의 비중이 컸다. 좌익의 풍성한 인적 자원이 북한의 공산국가 건설에 좋은 조건이기는 했지만, 구성이 다양한 만큼 노선 갈등의 소지가 많이 있었다.
이승만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상표일 뿐
1948년 가을 남한과 북한에 명목상 독립국이 세워진 후 양측 정부는 오랫동안 서로를 ‘괴뢰정부’라고 매도했다. 북한에게도 소련의 과도한 영향력 때문에 이런 욕을 먹을 빌미가 얼마간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정확한 지적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한 어떤 지향성도 보여주지 않는 대신 주어진 여건을 이용해 권력의 독점에만 힘을 쓴 기회주의 정권이었다. 초기의 이승만 정권에게는 좌우 양쪽으로 강한 경쟁자가 있었다. 좌익에 대해서는 미국의 반공 지침을 등에 업고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길로 나섰다. 국시(國是), 즉 국가의 존재의미를 ‘반공’이라는 부정적인 명제에 두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말은 국민들의 인권이나 행복에 앞서는 위치를 남한에서 오랫동안 누리게 된다.
오른쪽의 경쟁자는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출신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승만 자신 민족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고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기준으로 서로 힘을 합쳐야 할 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상표요 치장물에 불과했다. 권력 독점을 위해서는 친일파의 등용도, 옛 동지들의 암살도 개의치 않았다. 가짜 민족주의를 내걸어 진짜 민족주의를 따돌리고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이 쉽게 이뤄지는 일일 수 없었다. 그런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무리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권 장악 후 지키기 위해 저지른 범죄는 장악 과정의 무리를 무색하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정권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몇 가지 일만 살펴보자.
일본지배기의 청산은 광복 후 국가와 민족의 진로 설정을 위해 꼭 필요한 과업이었다. 군정 3년간 지체된 이 과업에 착수하기 위해 건국 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일본경찰 출신 경찰요원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탄압한 끝에 1949년 8월까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반민족행위 혐의로 조사받은 680여 명 중 1950년 3월까지 단 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들도 1년 내에 모두 풀려났다. 그 결과 남한의 민족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3권 분립 원clr도 무너져 이승만 독재정권이 세워졌다. 좌익 경력의 인물들을 강압적으로 전향시킨 것만 가지고 사상의 자유 운운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그렇게 전향시킨 사람들로 보도연맹을 조직해 두었다가 전쟁이 터지자 불러 모아 학살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국가범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유대인을 보호해 주겠다고 등록시켜 두었다가 그 명부를 조직적 학살에 이용한 나치의 범죄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950년 말 중국의 참전에 밀려 서울을 두 번째 버릴 때 이승만 정권은 17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 민간인을 국민방위군으로 조직한다며 약 50만 명을 징집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징집당한 이 군중에게 군복도 막사도 식량도 지급하지 않아 수만 명이 얼어 죽고 굶어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북한 측에게 의용군 자원을 빼앗기지 않고 측근의 테러단체를 준군사조직으로 키우려던 이승만의 욕망과 야심에서 빚어진 이 사태는 그가 국민과 국가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본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념 측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누렸다.
남한과 북한의 건국 과정에서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것이었다.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에 이념성이 사라진 것은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에 지향성이 없던 상황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은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세계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공산주의 확산 기세 앞에 이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편의 위주로 남한을 운영하다 보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자본주의까지,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이승만 집단을 키워내게 된 것이었다.
이념 측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누렸다. 계급혁명을 통한 공산사회 건설이라는 지향성은 지식층과 지도층에서 폭넓은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민위원회를 빨리 구성해 군정을 대신할 수 있었다. 과거 청산도 남한보다 순조로웠다. 그러나 소련의 과도한 영향력이 북한 체제에 큰 부담이 된 측면이 있다. 해방 당시의 소련은 ‘현실 공산주의’의 대표로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혁명의 본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많은 병리적 문제를 가진 국가였고, 이로 인해 신생 공산국가들에 대한 그 지도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의 고전적 공산주의에는 일당독재, 통제경제, 지도자의 우상화 같은 관념이 없었다. 이런 현상이 소련에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 조건들 때문이었다.
산업화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가 첫 공산국가가 되었다는 것부터 특이한 상황이었다. 그 위에 혁명 후 4년간의 내전부터 시작해 선진국들의 경제봉쇄 등 역경 속에서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키워야 하는 비상사태의 연속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장기화된 비상사태가 낳은 결과였다. 이 공포정치가 당시 소련이 무너지지 않고 산업화를 이룩해 2차 대전의 엄청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소련 지도부 자체가 비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무리한 체제였다. 그런데 1945년 당시에는 모든 공산국이 스탈린 체제에 경의를 표하고 그 지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북한은 그 중 하나였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겪어 온 남한, 정통성에 집착해 온 북한
1945년의 소련은 세계 유일의 성공한 공산국가였다. 그때까지 십여 년간 소련을 이끌어온 스탈린 체제를 온 세계 공산주의자의 대다수가 공산주의 성공의 열쇠로 여기고 있었다. 소련은 자기 영향권에 들어온 나라들을 일당독재와 통제경제의 길로 이끌었다. 그 체제에 들어온 많은 나라에서 지도자의 우상화가 행해진 것도 소련을 본받은 것이었다. 식민지 또는 점령상태에서 벗어나 독립한 나라들은 대개 산업화와 경제개발이 뒤진 상태에 있었다. 30년 전 자기네와 비슷한 상태에 있던 소련이 세계 최강을 다투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기에 이른 것이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소련의 뒤를 따르려 했다.
일당독재와 통제경제도, 심지어 스탈린 식 공포정치까지도,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부득이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다. 부득이한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을 위해 고통과 파괴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한국내전을 통해 한반도에서 두 체제가 마지막으로 넓고 깊은 접촉을 가졌을 때, 좌익 출신을 포함한 남한의 대다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전체주의에 가까운 권력구조와 정치행태 때문이었다. 김일성 집단은 이승만 집단보다 훨씬 든든한 정통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남한에서 여러 번 정권이 바뀌는 동안 연속적인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 정통성 덕분이었다. 이 정통성은 정권을 지켜주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또한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힘으로도 작용했다. 남한이 혼란스럽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발전을 거듭해 오는 동안 북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며 오늘에 이르렀다.
주어진 광복은 무늬만의 광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정한 광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출발 단계의 남한 정권은 북한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하고 예속성이 강했다. 그러나 활발한 진화과정을 60년간 거치면서 그런 대로 자기 앞을 가리는 나라로 발전해 왔다. 광복의 출발점을 웬만큼 활용해낸 셈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겪어 온 남한과 정통성과 연속성에 집착해 온 북한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 어울림이 풀려나가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민족 광복의 마무리 단계가 펼쳐질 희망을 가진다. (김기협/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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