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KTX승무원들에게

녹색세상 2008. 12. 3. 13:57

 

 

먼저 1000일 넘는 세월 동안 싸워온 KTX승무원 여러분들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행정법원으로부터 ‘KTX승무원들을 철도공사 직원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에 이어 서울중앙지법원 민사부에서 “해고된 여승무원들이 담당했던 KTX 승객 서비스 업무에 대해 철도유통은 형식적으로 철도공사와 맺은 위탁 협약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외향을 갖췄지만 사업의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대행 기관의 구실을 했을 뿐”이라면서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원고인 승무원들에게 매월 180만 원씩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 오미선 철도노조 케이티엑스(KTX) 승무지부장(오른쪽 두번째) 등 해고 승무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8월 31일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역 안 조명철탑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판결 소식을 듣고도 “기쁘기보단 조심스럽고 불안하다”는 오미선 지부장의 말처럼 “본안 판결이 아니라거나 사장이 공석이라는 핑계를 대며 복직을 미루지 않을까 걱정”이 되겠지만 승소했으니 마무리 절차만 남은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싸우느라 힘들어 포기한 동료과 이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쟁한 분들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한 때 함께 투쟁한 동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승리가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같이 싸우던 동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갈 때 얼마나 힘들고 섭섭했겠습니까? 끝까지 같이 갈 줄 알았던 맏언니가 포기했을 때의 그 서운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이제는 승자다운 아량으로 그들을 감싸 안을 때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종합부동산세의 실질적인 사망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상식 이하의 판결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온갖 머리를 다 짜내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시절 KTX를 개통하면서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며 여러분들을 유혹 했을 때 ‘철도공사 정규직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요. 더구나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살아난 이철이란 사람이 사장이었기에 그 믿음은 더욱 확고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고 보니 철도공사 직원은 커녕 엉뚱한 자회사의 비정규직이란 사실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이미 노무현 정권은 공기업민영화란 정책을 세워 놓고 KTX여승무원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온갖 장난질을 친 것이지요. 이에 분노한 여러분들은 철도노조에 가입하고 ‘철도공사 정규직 약속을 지키라’며 파업에 들어갔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복귀명령’을 내세워 해고의 칼날을 들이대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일 하지 않을 자유조차 없다는 것을 그 때야 안 여러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겁니다. 그제야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안 KTX승무원들의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을 오갈 때 마다 KTX중심으로 배차를 해 놓아 타지 않을 수 없어 서울역 앞에서 “우린 KTX승무원으로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며 절규하는 질녀 같은 여러분들을 볼 때 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공공재로 사회간접자본인 철도를 국민들의 이동권 보장에 사용하지 않고 돈 벌이에 혈안이 되어 국민들의 발을 볼모로 잡는 치사한 짓거리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야비했습니다.

 

▲ 한국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는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이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이들의 고용관계가 불법파견이 아닌 적법 도급이라는 노동부 재조사 결과 발표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공기업인 철도공사 관리자들의 문서로 보장하지 않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숙 했던 여러분들이 거리로 나가 권력과 싸울 줄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저 역시 ‘저러다 얼마 못 가서 포기하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끈질기게 싸웠고 우리 사회의 양심은 여성노동자들이 내민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을 통해 여러분들은 ‘연대투쟁’이란 것을 온 몸으로 배웠지요. 그 와중에 ‘여승무원’이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도 깨달으면서 이 땅에 만연한 ‘성차별’도 알게 되었습니다.

 

‘연대투쟁만이 살 길’임을 몸으로 알았기에 종일 서서 일하면서도 겨우 90만원도 못 받고, 그마저 해고당한 이랜드ㆍ뉴코아 유통노동자들, 아직도 싸우고 있는 기륭전자 아줌마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철폐’를 부르짖었습니다. 곱게 자라 대학 나온 여성들이 매장과 생산현장에서 땀 흘리는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마 노무현 정권이 노동자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이는 인정할지언정 차별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구나 성차별과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천박한 사회라고 자본과 권력이 스스로 드러낸 것임에 분명하지요.

 

원래 비정규직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 기간 동안 고용을 하고, 임금은 정규직보다 더 많이 주도록 계약을 하는 게 자본과 권력이 거품 물어가며 떠든 선진국에서 하는 고용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놈의 세상은 어떻게 된 판인지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은 적게 주고, 언제 차 버릴 궁리만 하는 악랄한 짓거리만 하는 그야말로 천민자본주의 사회죠. 이번 법원의 가처분 결정 소식을 듣고도 “기쁘기보다 조심스럽고 불안하다”는 여러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도 그렇게 했는데 더 악랄한 이명박 정권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 서울역 들머리에서 열린 ‘케이티엑스(KTX)·새마을호 승무원 직접 고용 해결 촉구’ 기자회견장에 나온 승무원들의 어머니들이 사회자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아무리 미룬다 해도 이젠 고개를 넘어선 내리막길이니 마무리 잘 하리라 믿습니다. 그 동안 싸우느라 심신이 많이 지쳐 있고, 온 몸이 병들었을 테니 건강 잘 추스르기 바랍니다. 특히 쌓인 분노로 어떤 정신과 질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심리검사도 받기를 세상을 좀 더 살고 겪은 선배로서 감히 권면을 하려합니다. 뉴코아 노조와 이랜드 노동조합의 투쟁이 완전 승리는 아니지만 자본이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비정규직 투쟁이었듯이, KTX승무노동자들의 싸움 역시 새로운 획을 긋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김치 국물 부터 마셔서는 안 되겠지만 현업으로 돌아가기 전 도중에 포기한 동지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가자’며 서로 위로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비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지금의 승무원들 또한 연대해야할 동지들이니 잘 보듬는 아량을 갖고 있을 줄 압니다. 딸들이 1000일 넘게 힘들게 싸우는 동안 함께 하신 부모님들이 누구보다 더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자식과 같이 피눈물을 삼키며 싸우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이젠 백발이 내린 할머니가 된 민가협의 어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차별이 있어 오랜 기간 투쟁으로 단련된 여러분들의 경험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힘들어 지쳐 있을 때 ‘배불러 저런 짓 한다’며 염장 지른 함량미달 때문에 속도 상했지만 ‘고생한다. 분명 이긴다’며 따뜻한 손길을 내민 이웃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더 낮은 곳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오체투지를 떠나기 전 환갑이 넘은 문규현 신부님과 도법 스님이 막내 딸 같은 여러분들을 먼저 찾아가 인사한 것도 그런 연대의 마음과 인연의 표현이라 압니다. 이제 고속열차를 타고 미안하지 않고 반갑게 여러분들을 볼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 동안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애인과 같이 영화도 보러가고, 투쟁하느라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그 동안 고생 많았고 절반을 넘어선 KTX여성노동자들의 승리를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