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1986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대구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중구 남산4동(현 까치 아파트)에서 개척을 해 어느 덧 20 여년의 세월이 흐른 민중교회입니다. 당시 민중교회가 대구 지역에도 5개 있었으나 김영삼 정권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이 교회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자유로운 교회’일 뿐 민중교회라 부르기는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성서 해석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아 ‘예수의 기적사화, 창조설화’라고 하지만 ‘민중교회’라기 보다 기성 교회에서 상처받은 신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교인 중 청년운동을 같이 한 후배 부부의 중2 딸이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해 1년여에 걸친 고민 끝에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며 자식의 손을 들어 주면서 의무 교육임에도 학교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던 다른 길을 가든 알아서 선택하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습니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가 봅니다. 제 아이가 7살 때 글자와 수리 개념을 억지로 안 가르치며 ‘원할 때 하자’고 다짐을 해 놓고는 다른 아이들은 다 아는데 내 자식이 모르니 불안해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자식 문제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경험을 한 저로서는 어려운 결정을 한 후배 부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집에서 계획표를 세워 책도 읽고 하던 중 도법 스님이 몇 년째 하고 있는 ‘생명탁발 순례’를 가고 싶다고 해 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엄마도 같이 갔습니다. 순례 마지막인 서울 쪽이라 시골 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 마실 줄 알았는데 도심을 걸으니 조금 실망을 했던 모양입니다.
예정한 3일을 마치고 집으로 와야 하는데 갑자기 “엄마, 나 탁발순례 계속하면 안 되요”라는 말에 날씨도 추워지고 여자 아이를 혼자 두고 오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게 부모 된 자의 당연한 심정이겠죠. 쉽게 승낙을 할 수 없어 몇 시간 고민을 하다 “그러면 스님한테 허락부터 받아라”고 했더니 얼씨구 하며 도법 스님에게 쏜살 같이 달려가 보챈 끝에 승낙을 받아 ‘탁발순례 최연소 단원’이 되어 전국에서 온 사람들과 같이 노는 ‘전국구 10대’가 되었습니다. 자식을 떼 놓고 온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을 하고도 남죠.
주말이면 옷도 챙겨줄 겸 몇 번 다녀왔는데 예배 후 서로 얘기를 나누는데 보니 엄마의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을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그쳐 조부모가 계신 부산까지 혼자 여행을 시킨 어느 부부의 사연이 떠올랐습니다. 어디에 가서는 누구를 만나고, 어느 대학교에 가면 총학생회를 찾아가서 ‘왜 왔느냐’를 말하고 부모가 적어준 ‘편지를 보여주라’며 기본 교통비에 조금의 여유돈만 주어 보냈으니 자식 교육 철저히 시키는 부모죠.
대학생들은 너무 기특해 밥도 사주고 잠도 재워 주며 그 지역의 이름난 곳을 구경 시켜주었고, 만나보라는 어른들은 너무 대견해 자신이 쓴 책도 챙겨주고 차비까지 줘 보내고 ‘자식교육 잘 시킨다’며 격려 전화도 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거론하면서 “나도 아들 녀석을 그렇게 하려고 했고, 중학교 들어가면 최소한 경상도와 전라도 정도는 자전거 여행을 같이 할 생각이었다.”면서 “6학년 어린 아이를 혼자 보낸 것도 대단하지만 내 계획 역시 사내 녀석이라 가능하지 딸이라면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딸이 아닌 아들이라면 걱정도 덜하고 기특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부모로서 걱정하는 심정이야 당연하지만 “성차별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목사가 바로 “성차별로 보면 안 된다”며 제 말을 바로 묻어 버렸습니다. 교인들이 옆에 있어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면 분위기가 삭막해 질 것 같아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으나 목사의 힘으로 누르려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성서나 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교인들과 목사의 갈등은 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런 기운을 어떤 방향으로 나타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매주 나오는 것도 아닌 교인과 목사의 영향력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성차별로 보면 안 된다”고 했으면 그 이유를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가니 짓누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남도 아닌 젊은 시절 이 땅의 ‘하느님나라 확장운동’을 같이 한 후배 부부네 일이라 제가 함부로 말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가로막은 횡포로 인해 상한 마음이 제법 오래가더군요.
말로는 ‘차이를 인정하자’고 해 놓고는 같이 자식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한 말이 일방적으로 잘리고 보니 황당하기도 했죠. 이럴 경우 설전도 불사해야 하는데 교인들 앞에서 참으며 표정관리 하려니 참 어렵더군요. 그것도 지역에서 진보적인 목회자란 양반과 부딪쳤으니 말이죠. 역시 상처는 가까운 사이끼리 주고받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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