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위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한국경제

녹색세상 2008. 11. 1. 14:18
 

사람은 기억이 있기에 배움이 가능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인 기억과 경험은 사람에게 문자로 환원할 수 없는 지혜와 통찰력을 선사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는 집단지성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당면한 위기에 내장된 과거의 반복된 징후와 패턴을 직감하고 선제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다. 모든 경제현상에는 불황과 호황이란 주기가 있고 경제파국으로 치닫는 위기의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각 경제주체는 이처럼 변화하는 시장흐름에 맞추어 자신의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찾고자 절치부심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침체의 시기에 허황된 경기 부양론을 외치거나 무심한 경기순환을 탓하기보다 주기의 흐름에 맞는 대응을 할 수 있는 사회의 힘을 키우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기억을 잃어버린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10여년 전의 ‘IMF사태’(외환위기)의 기억이 반면교사로서 오롯이 살아있음에도 말이다. 4차원의 현실에서 시간축이 사라진 3차원 세계, 아니 3차원 중에서도 세계경제란 공간이 아닌 한국경제란 일부 공간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은 처연할 정도다. 민간부문의 무분별한 외화차입과 정책당국의 허술한 외환관리가 국가파산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이것을 방조하며, 서브프라임 위기의 전조가 드러나는 시점에 7%성장을 외치고, 미국금융시장이 붕괴되어가는 한 가운데 리먼의 인수를 추진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함은 물론 이명박 정권의 협소하기 그지없는 시야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들이 노무현 정권을 향해 외치는 잃어버린 10년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자조적인 고백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 금융위기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는 이명박과 강만수 (사진:오마이뉴스)


물론 정책을 직접 추진하는 당국과 비판자의 입장과 평가는 다를 수 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불안하지만 의연하게 시장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고 비판자의 입장에서도 이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국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부가 엉망인데 비판자마저 정부의 입장만을 믿는다면 그 국가는 브레이크 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는 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서 곁눈질만 하고 있다는데 있다. (위기의 파도는 바라보는 자의 자세에 연연치 않고 전신을 덮쳐온다) 국내시장과 해외 소식통 모두가 위기라고 하는데 정부는 독야청청 위기설을 부인하고 자신과 국민의 머리에 세뇌시키고 있지만 자신의 손과 발은 위기인 양 바쁘게 움직인다. 실용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을 실용정부가 잊은 모양이다.


정부의 정보 우위력이 상실된 디지털 시대에 시장이 정부 대책의 실효성, 향후 남은 정책대안과 실제 가용한 외환보유액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날로그 정부가 잊은 모양이다. 정치권과 정부부처는 아직도 전정권의 실정을 탓하고 있고 핵심 없는 정책나열에다 책임회피까지 일삼고 있다. 금리는 동결 혹은 인상시키면서 외환시장 안정과 부동산 시장 거품을 꺼트리는 방향으로 가고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부양과 복지시스템 강화를 나서야할 판에, 금리를 인하시키고 그것이 약발이 받지 않자 국민연금을 퍼붓고, 재정지출이 늘어나는 형국에 감세정책을 펼치는 것은 뭔가 잘못집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특히 이 지경에 소비탄력성이 없고 국내 투자 효과와는 연관성이 없는 종부세를 완화시키고 부동산 금융규제마저 푸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외국인 투자가가 주식을 매도세가 강한 시점에 주가를 높이고 환율을 방어하려는 명시적인 사인을 보내는 것은 떠나는 외국인투자자의 뒷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는 것으로 정책당국자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 민간부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때 국민의 혈세로 살아난 은행이 치열한 경쟁과 신용평가기능 강화 대신 손쉬운 소매대출과 부동산 대출, 높은 예대마진과 수수료, 방만한 점포경영으로 배불릴 때는 정부의 개입을 시장에 간섭한다며 비난하더니 자신이 초래한 외화차입, 은행채 남발, 부실대출로 어려워지자 이제는 가시적인 자구노력은 보이지 않은 채 은행 달러차입에 대한 지급보증 등 정부의 개입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은 이중적이다. 이에 정부는 이것이 모럴 해저드로 이어지지 않게 명확한 기준과 벌칙, 구조조정을 강제하지 않고 속절없이 이들의 압력에 밀려 이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결국 이런 식의 문제해결은 결국 민간부문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결국 망하지 않는다’라는 확신 속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만한 부실 경영을 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한다. 건설부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건설호황기에는 규제철폐를 바탕으로 마구잡이로 저지른 아파트가 이제는 자기 발목을 잡게 되자 정부더러 미분양 물량과 토지를 매입해 달라고 떼를 쓰고, 나라가 어찌되든 각종 금융ㆍ부동산 규제를 풀어 자기숨통만 트고 보자는 심산으로 달려들고 있다. 물론 이번에도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용했다. 정부에 대해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쳐도 이런 상황에서 시장 행위자들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시장의 무서운 힘과 공권력의 권위를 배우겠는가. 아니면 혼란의 와중에서 국민을 담보로 결국 자기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10년 전의 체험을 반복하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유리할 때는 시장을 찾고 불리할 때는 정부에게 손 벌리는 희한한 시장주의자가 우리나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임을 재확인 하겠는가. 위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윤재웅 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