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22억짜리 강남 아파트 11억에 내 놔도 안 사.

녹색세상 2008. 9. 19. 10:33
 

입찰 법정 풍경…매물 62건 중 12건만 낙찰


18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입찰 법정. 최초경매가(감정가)가 8000만원인 서울 명륜동의 한 다세대 주택(43.23㎡·13.1평)을 두고 입찰 경쟁이 벌어졌다. 판사가 입찰자와 그들이 써낸 입찰금액을 부르자, 법정 이곳저곳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최초 경매가보다 1000만원이나 높은 9000만원대의 입찰금액이 연달아 나오더니 뒤의 두 입찰금액은 급기야 1억원이 넘었다. 결국 유아무개씨의 입찰금액 1억 2060만원이 낙찰가가 됐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이내 법정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 날 법정의 감탄사는 이걸로 끝이었다. 이날 경매 매물로 나온 62건 중 50건은 입찰자가 아예 없었다. 이날 법정 입구에서 입찰자들에게 경매 정보지를 팔고 있던 A씨(경매업체 소속)는 “요새 정말 안 된다, IMF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법정과 복도에 사람들이 까치발을 한 채 빼곡히 들어찬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됐다. 그는 “당신 같으면, 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사겠느냐”고 말했다. 순간, 무더기 유찰에 힘 빠진 이날 입찰 법정의 모습이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촉발된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겹쳐졌다.

 

▲ 한국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샤태의 서곡?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입찰 법정에선 감정가가 28억원인 타워팰리스(전용면적 165㎡)가 19억3600만원에 낙찰됐다. 이 주택을 담보로 23억 9100만원을 대출해준 은행은 4억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사진:오마이뉴스)



이날 오전 10시 갓 문을 연 법정 안은 썰렁했다. 몇몇 입찰자들이 경매에 나온 부동산 명세서를 열람하거나 경매 정보지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입찰표를 작성해 입찰보증금과 함께 법원에 제출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반면, 법정 밖에는 대출업자·경매컨설팅업자 등 경매브로커들로 북적였다. 기자가 법정 안에 들어서려 하자, 순식간에 10여명이 몰려 명함과 경매 정보지를 손에 쥐어줬다. 대출업자들의 명함엔 몇몇 시중은행 로고와 함께 ‘최적의 대출조건을 찾아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는 문구가 확연했다. 손에 쥔 명함에는 시중은행 대출담당 직원의 명함도 섞여 있었다. 명함 뒤쪽에는 ‘연 금리 6%대로 낙찰가의 70~90% 대출’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대출업자 B씨는 “제1금융권은 낙찰가의 50%까지, 캐피탈 같은 곳은 80%까지 대출해준다”고 귀띔했다.


입찰이 마감되고 경매가 시작되는 오전 11시 10분에 가까워지자, 법정 안은 입찰자와 경매브로커들로 가득 찼다. 경매 정보지를 파는 A씨에게 다가가 “많이 팔았느냐”고 묻자 “9시에 와서 지금까지 겨우 하나를 팔았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아파트 값이 1/3은 떨어져야 정상이고, 그래야 여기가 예전처럼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며 “IMF 때 1억 5천만원이었던 잠실 주공아파트 119㎡(35평)짜리가 지금은 12억원을 훌쩍 넘는다, 누가 사겠느냐? 10억씩 빠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A씨는 “부동산이 폭등하던 2~3년 전만 해도, 오피스텔 나오면 감정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에 거의 다 낙찰되고 경쟁률도 30:1이었다”며 “지금은 1~2번 유찰은 기본”이라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부자들 게임인 부동산 시장, 파국으로 치달아’


오전 11시 10분 경매가 시작되자, A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아니, 상황은 더 심각한 듯 했다. 7번의 유찰로 감정가 6천만원의 1/5인 1258만원에 매물로 나온 서울 중구 남창동의 한 상가는 이날 아무도 입찰에 나서지 않아 8번째 유찰을 기록했다. 서울 강남권의 부동산들도 대부분 유찰을 피할 수 없었다. 감정가가 22억원인 서울 서초동의 244.93㎡(74.1평)짜리 한 아파트는 이날 11억 2640만원에 경매로 나왔지만 역시 유찰됐다. 벌써 4번째다. 유찰될 때마다 20%씩 경매가가 떨어지는 터라 이 건물은 다음엔 9억 112만원에 입찰자를 기다리게 됐다. 이날 경매로 나온 62건 중 12건만 낙찰됐다. 이 또한 대부분 최소 한두 번은 유찰된 부동산이다. 경매컨설팅업자 C씨는 “고객이 서울 강남의 빌라 하나를 입찰해달라고 해서 나왔는데 취소됐다, 지금 사면 손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을 경매계의 펀드매니저로 소개한 C씨에게 “앞으로 부동산 값이 오르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급격히 떨어지면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가 나고, 오르면 집값 때문에 서민이 고통 받는다”며 “너무 많이 오른 건 사실이다,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이어 그는 “서민들은 집이 없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채 가지고 있다. 부동산 시장은 부자들끼리의 게임인데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며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내비쳤다.


묻지 마 대출의 결과는?


이날 경매는 최소 1~2시간은 진행되는 보통 때와 달리 30여분 만에 끝났다. 모두들 ‘이렇게 빨리 끝나는 날은 처음’이라고 수군거렸다. 이날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낙찰자들이 법정을 빠져나가자 대출업자 10여명이 순식간에 달라붙는 모습이었다. 낙찰자들은 대출업자들을 뿌리쳤지만 이내 손에는 명함이 가득했다. 집요하게 전화번호를 캐묻는 이들이 법원 건물을 나갈 때까지 따라붙었다. 대출업자 D씨는 “어느 은행이든 다 연결시켜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출한 것을 못 갚는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되면 다시 경매로 내놓으면 되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낙찰에도 입찰자가 없는 이날 경매 부동산 리스트와 D씨의 자신감과는 큰 괴리가 있어 보였다. 이날 대출업자들의 모습에 A씨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집값이 떨어질 텐데…”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판 부동산 거품 빠지는 것만 남아 있다. 부실 대출에 대한 부담은 은행이 고객들의 돈으로 때울 것이니 이래저래 국민들만 손해를 본다. 일본이 보낸 ‘악몽의 10년’을 우리가 보낼 여력이나 있는지, 거기에 대한 대비책은 세우고 있는지 걱정이다. 일본이야 든든한 내수시장이 있어 견딜 수 있었지만 내수시장이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데다 지갑이 텅텅 비어 있는 상태라 고통의 나락으로 빠질 일만 남았다. 저물어가는 미국의 시대를 계속 붙잡고 있는 관료들이 얼른 꿈을 깨야 할 텐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