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독일 교회에 부는 녹색 바람

녹색세상 2008. 9. 17. 10:25
 

남한의 진보진영은 꿈이나 꾸는지

 

작년 말 민주노동당 시절 대통령 선거 기간에 사진 찍는 일로 시당 사무실을 들락거리곤 했다. 십여 년 만에 손에 잡은 카메라의 감각도 익힐 겸 중요한 시기에 사진 찍다 보면 ‘명작’ 몇 장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다. 찬바람에 익숙한 직업 탓인지 사무실에 들어가면 따뜻해 상의를 벗곤 했는데 히터도 돌아가건만 하나 같이 전열기를 옆에 두고 있어 의아하기만 했다. 결론은 나는 내복을 입었고 당직자들은 내복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전기사용을 줄이기 위해 내복 입자’고 써 붙였다간 ‘또 별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그냥 넘어갔다.

 

▲전원주택지에 설치한 태양열 집열판 주택. 수요가 적어 초기 설치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비용이 오히려 적게 든다. 몇 집이 같이 설치할 경우 비용 절감을 할 수 있다.


집에서야 자기 돈을 내니 맨몸으로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빵빵하게 보일러 돌려도 간섭할 일이 아니지만 공금을 사용하는 정당 사무실, 그것도 친환경을 들먹이는 진보정당에서 전기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환경단체에서 ‘겨울철 내복 입기’ 운동을 벌인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진보정당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지 ‘사소한 일’로 치부해 버린다. 우리 보다 에너지 사용 비율이 낮은 독일의 교회에 ‘녹색바람’이 불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태양열을 이용하고, 전력 낭비를 막기 위해 실내조명의 밝기도 낮추었다.


교인들은 예배 참석 시 자동차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등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연료절약’을 실천하고 있다. 환경파괴가 없는 태양열 이용을 위해 지붕을 교체하고, 겨울 난방 온도를 낮추고 전력 효율이 높은 전구로 바꾸면서 조도까지 낮출 정도로 세심한 부분까지 실천하고 있다. 신자들 개개인의 자발적인 동참도 이어져 쓰지 않는 전구는 끄고 겨울에는 실내에서도 외투를 입는 등 불편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일교회가 벌이는 친환경운동의 정신은 간단하다. ‘하느님이 창조한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지극히 소박한 신앙고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는 ‘개발은 어쩔 수 없다’며 ‘인간을 위한 환경 파괴는 묵인’한 기존의 관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동안 환경 파괴의 주범 중 하나가 교회였다는 자기 성찰과 고백에 따른 것이 ‘녹색교회’ 운동이다. 독일에서만 이런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국교인 성공회는 ‘2050년까지 교회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재의 40퍼센트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2030년까지는 모든 사제관에서 태양열을 이용한 온수 사용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미국의 ‘휘발유 없는 주일’을 시행하는 교회에서는 목사와 신자들이 예배 참석 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담임 목사가 보내는 편지는 종이편지가 아닌 누리편지(이메일)로 바꾸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거대한 담론만 들먹였을 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의 실천과 자기 성찰이 있었는지 진보 정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고민해야 한다. 대기 오염의 주범이 공중 굴뚝 연기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편리하고 ‘업무의 효율성’이란 말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몸을 좀 더 움직여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매일 힘들다면 일주일에 하루는 ‘승용차 없이 일 보는 날’을 정해 차차 넓혀 나가는 노력을 할 때 대중들은 신뢰를 보낼 것이다.


평소 운동할 시간 내기 어려우니 ‘자전거로 출퇴근’ 하거나 출퇴근만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의 하나다.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된 것이 제국주의의 끈질긴 공격이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자기 성찰이 없었던 관료화도 한 몫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자기 성찰이 없이 구조적인 문제로만 돌리는 변혁운동은 새로운 관료화를 재촉하는 것일 뿐 ‘민중의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독일교회의 녹색운동을 보고 진보정당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자기 실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