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눈에는 안 보이는 ‘국민 촛불’
정당ㆍ시민포털ㆍ생활운동단체 결성으로
7월7일 다음 카페의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http://cafe.daum.net/stopcjd) 게시판에 “언소주 카페의 법인화를 제안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카페 도우미(운영진) 일동 명의였다. 이른바 ‘조중동’ 광고주들에 대한 불매운동의 진원지로, ‘조선일보’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유명세를 탔던 카페다. 도우미들은 글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온라인 집단인 커뮤니티 단계로는 조·중·동과 검찰의 탄압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렵고, 언론소비자 주권운동을 지속시키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사람과 돈을 갖춘 조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선언했다. 법인화는 그 고민의 결과였다. 제안은 두 가지였다. △회원 1인당 1만원의 창립기금을 모아 사무실과 독립적인 누리집(홈페이지) 등을 마련하자 △평생 월회비 5천원을 내는 회원 1만 명을 모아 2~3명의 상근자를 두고 언론운동을 끝까지 계속하자. ID ‘의미 있는 방향’은 “이 운동은 5년 이상의 장기간으로 이뤄질 때만 바른 언론이 서고, 국민의 의식이 바뀔 것”이라며 “창립기금과 회비 모두 내겠으니 법인화를 꼭 추진해달라”고 적었다. 7월11일 현재 700여 명의 회원이 찬성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고시 철회와 재협상을 요구하던 시민들이 아고라기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광화문으로 행진하다 경찰 버스에 가로막히고 있다. (사진:한겨레신문)
“지구전을 위해 연대 기구를”
4월의 청계광장에서 시작해 5월의 광화문, 6월의 태평로로 ‘이동’해왔던 촛불이 이제 7월에 이르러 ‘단체화’와 ‘조직화’ 단계로 ‘진화’했다. 흩어진 유기체에서, 단단한 자생 구조를 갖춘 생명체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 정치권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해 미국 정당정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로 성장한 미국의 ‘무브온’(www.moveon.org) 같은 온라인 정치집단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학계와 진보 진영에서도 촛불이 새로운 운동단체와 시민단체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신광영 교수(중앙대)는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www.knsi.org)에 기고한 글을 통해 “2008년 봄의 촛불시위는 새로운 대안적 정치의 탄생을 촉발하는 기폭제”라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인터넷 정당과 인터넷 국회와 같은 대안적인 정치조직이 인터넷에서 실험될 가능성을 열었다”며 “참여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정치 실험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고 말했다.
김종엽 교수(한신대)도 ‘창비 주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두 달간 이뤄졌던 촛불의 발전을 더 진화시켜야 할 때”라며 “촛불은 이제 지구전으로 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지구전을 위해, 집회 방식의 변화를 위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보다 더 높은 수위의 연대 기구, 이를 테면 ‘촛불회의’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는 물론 누리꾼들의 움직임에 기초한다. 6월6일에는 인터넷 정당을 표방한 ‘촛불당’ 창당 준비위원회(www.candleparty.or.kr)가 다음 카페에서 시작됐다. 7월11일 현재 회원은 5200여 명. 카페지기인 ID ‘캔들파티’는 “두 달간 계속된 촛불시위에도 정부와 여당은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이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이들이 결집한 힘이 없기 때문이란 판단 아래, 힘을 모아 결집하기 위해 촛불당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촛불당은 누리꾼들의 집단적인 참여와 토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른바 ‘웹2.0’ 방식의 창당을 지향한다고 했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 어느 정당도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누리꾼들의 집단소송을 준비 중인 다음 카페 ‘명예훼손 조선일보 집단소송 원고인단’(http://cafe.daum.net/pro-secutors)은 ‘국민포털’을 만들자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주주 1인당 1만원씩 모아 자본금을 마련한 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민포털을 설립하자는 것이다. 다음 아고라 게시물들이 정보통신심의위원회 규제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속속 삭제 또는 차단되면서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1988년 당시 ‘한겨레신문’의 창간 방식과 유사하다. 이 카페에는 현재 654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다음 아고라를 보완할 공간도 이미 만들어졌다. ‘아고리언’(www.agorian.or.kr)이 대표적이다. 아고리언의 하루 방문자 수는 3만 명 수준이다. 하루 4만8천 명까지 몰릴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아고리언을 관리하는 성기웅 씨는 “혹시나 싶어 아고라의 대체공간으로 만들었는데, 다음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 같다. 처음에는 1년 정도 생각했는데, 이제는 촛불이 꺼질 때까지 계속 운영하려고 한다. 새로운 정치적 커뮤니티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좌파란 말이 뭔지도 모르던” 평범한 회사원 성씨를 이명박 정부와 촛불이 이렇게 변화시켰다. 자유로운 토론 공간에 대한 요구는 다양하다. ID ‘솔롱고스’는 “온라인 방송국 ‘아프리카TV’나 ‘다음팟’ 같은 인터넷 TV를 활용한 시간 제약 없고 자유분방한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촛불의 정치세력화와 조직화에 대한 일부 다음 아고리언들의 의견
웹2.0의 특성에 맞는 조직
개인도 변화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대우 대표이사는 “촛불은 현재의 소비자 주권 운동, 언론개혁 운동과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 참여 운동(정당 참여)에 이어 ‘도덕적 기업 운동’도 새롭게 출발시킬 것으로 본다”며 “삼양라면 사주기 운동 등과 같이 도덕적인 기업이 각광을 받도록 하는 적극적인 소비 패턴이 벌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전한 먹을거리와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을 촛불들이 만들어낼 것이란 전망이다. 김씨는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사회를 생각하는 중소상공인 모임’을 만들고 싶다”며 “근로기준법 준수, 정규직 채용, 준법, 성실 납세,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시민단체의 측면 지원, 도덕적 기업의 네트워크 형성에 관심이 많은 중소기업주들이 많을 테니 이들을 묶어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유신세대’와 ‘386세대’를 잇는 ‘촛불세대’가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1960~70년대가 반독재 민주화운동, 80년대가 사회의 진보와 체제 변혁을 내세웠던 변혁운동, 90년대가 환경, 경제정의, 반부패와 인권 등을 내세운 시민운동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촛불운동의 시대다. 신광영 교수는 “2008년의 촛불시위로 먹을거리와 삶의 질이라는 일상생활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생활정치가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촛불세대가 만들 단체나 조직은 명망가와 활동가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존 운동단체와는 뚜렷한 차별성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개방성’과 ‘참여’를 기반으로 한 ‘웹2.0’의 특성에 따라 조직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 의견이 아닌 집단 지성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들이 이끌어온 기존 운동과는 달리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다. 여중생들이 시작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들이 이어간 것이 촛불이었다. 생활정치의 주체가 여성이 되는 것은,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것이 가정주부 등 여성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를 주도한 곳이 온라인 요리정보 사이트인 ‘82cook닷컴’(30~40대 주부 중심)과 인테리어·가구 정보 사이트인 ‘레몬테라스’(30대 주부 중심), 성형수술 커뮤니티인 다음 카페 ‘쌍코’(20대 여성 중심), 패션 커뮤니티 ‘새틴’과 ‘소울드레서’(20~30대 여성 중심) 등 20~40대 여성 커뮤니티였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여성 중심의 새로운 정치단체나 그룹이 등장할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촛불 그 자체가 민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촛불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가지게 된 악순환의 구조화를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한국의 민주화는 대다수 국민들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뤄졌지만, 이를 현실정치에 반영해야 할 정당정치는 소수의 보수 정치세력이 장악한 탓이다. ‘물갈이’로 유명했던 2000년의 총선시민연대의 등장과 2002년 효순·미선 추모 촛불 정국, 그리고 2004년의 탄핵 정국에서 시민들은 정치권을 뒤흔들었지만, 그 판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박 대표는 “대중운동은 의견의 조직화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일방적인 통치 행위를 제어하고, 중기적으로는 대안적 정치세력의 성장을 꾀해 장기적으로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무브온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조직적 차원에서의 답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발성의 공간, 그대로 두라”
물론, 촛불 지지자들 중에는 조직화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도 많다.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는 조창오 씨는 “촛불은 규제나 통제를 벗어난 자발성의 공간이며 토론의 공간이기에 이런 자발성의 공간을 그대로 두는 것이 촛불의 진정한 방향이자 목적”이라며 “그래서 이를 통해 어떠한 당을 만든다든지, 정치적 성향을 띠는 단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만들어지더라도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40대 중반의 가장이라고 자신을 밝힌 최원준 씨도 “조직이 구성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치가 개입될 가능성이 높고, 일부 인사들의 정치 입문의 장으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고 반대의 뜻을 밝혔다. (한겨레21/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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