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서 함께 하는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소수자나 약자를 누가 건드리면 그냥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행동은 취해야 직성이 풀리죠. 혈기가 넘치던 청년시절 ‘약한 사람들 돕는 게 사랑’으로 잘못 알고 도와주려고만 했습니다. 99년 5월 13일 첫 사고를 당한 후 ‘서로 사랑하자’고 약속한 사람이 그냥 있어만 줘도 좋았는데 그러지 않아 섭섭함을 넘어 분노에 가득차곤 했습니다. 집에 기르는 짐승이 아파도 돌보는 게 사람의 정리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사고 당한 환자를 외면하더군요. 그 후 헤어진 아이 때문에 가슴 아파할 때 신부인 후배와 목사인 선배가 넋두리 많이 들어주었습니다. 다른 것 없이 그저 같이 아파해 줬습니다. 술에 취한 하소연을 수 없이 들어준 그 분들 덕분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넋두리와 하소연을 들어주며 옆에 있었을 뿐 도와주려 하지 않는 그 분들을 보면서 ‘사랑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배의 부인은 ‘희용씨, 낳은 정이 더 무섭죠’라며 같이 아파해 주셨는데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 6.10일 한일극장 앞 도로에서 있은 6.10민주항쟁 기념 촛불문화제는 목사ㆍ신부를 비롯해 1만여명의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축제한마당의 한 장면.
체육대회 때 어느 친구가 ‘남들이 맞다면 맞는 거야. 넌 틀렸다’고 다짜고짜 말하기에 “표현이 심하다. 나를 인정만 해 주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다 “영어 할 줄 아는 이명박은 너 보다 똑똑해”라는 말까지 덤으로 던지는데 내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친구니까 이런 말 한다”는 그 말에 더 놀랐습니다. 분명히 윤희용의 실체와 가는 길을 인정해 주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이나 글을 통해 생각을 밝혔을지언정 강요나 강압적인 표현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친구란 이름으로 강요를 받고 전향까지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혀 밑에 도끼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잘 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에 조심하라는 속담으로 이해합니다. ‘강요는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남을 때리는 게 싫기에 맞는 것 역시 싫어합니다. 윤희용이 하는 짓이 꼴 보기 싫어 인정해 주기조차 싫으면 그냥 두지 친구의 이름을 붙여 두들겨 패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주말이면 대백 앞에서 3~4천 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노래도 부르고 자기 얘기도 하는 문화제가 열린다.
‘6.10항쟁기념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는 87년 이후 가장 많은 7~8천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한판 축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주말이면 수천 명의 시민들이 즐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대중들 앞에서 말하는 새로운 문화의 공간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내 얼굴 보고 싶은 사람은 주말에 대백 앞에 와서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 기분 좋은 자리라 어색해지기 싫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근로복지공단과의 행정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한 후 기운도 빠져 있는데 한 방 얻어맞고 나니 얼떨떨하더구만요. 내가 국회의원이나 시의원 출마해도 그런 소리 할지 의문을 갖는다면 너무 속 좁은 생각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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