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연세대 성악과 얼차려…1시간 ‘원산폭격’

녹색세상 2008. 6. 20. 09:22
 

당구채 든 선배 “박아!…XX놈들” 험한 욕설


지난 17일 저녁 7시, 서울 신촌동 연세대 음악대학 구관 한 강의실. 운동화에 간편복 차림을 한 100여명의 남녀 학생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한 남학생이 그들 앞에 서 있고, 당구채를 든 또 다른 남학생이 학생들 사이를 위압적으로 오간다. 후덥지근한 날씨이건만 모든 창문의 블라인드는 내려와 있다. “엠티 참가율이 낮다”,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다” 등의 훈계가 15분 정도 이어지다 갑자기 험한 욕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아!” 고함과 동시에 남학생들이 일제히 머리를 땅에 박고 손은 엉덩이에 올린다. 이른바 ‘원산폭격’ 자세다. 여학생들은 열외다. 한 선배 학생이 겁먹은 얼굴의 여학생들을 향해 외친다. “뒤에 기집애들 다리 모으고 서 있어. 흔들거리지 마.”

 

▲17일 저녁 취재진이 얼차려가 진행되고 있는 연세대 음대의 한 강의실로 들어서려 하자 한 남학생이 막아섰다. 그 뒤로 얼차려를 받던 일부 학생들이 놀란 모습으로 취재진을 쳐다보고 있다.


이날 행사(?)는 이 대학 음대 성악과 학생회 차원에서 이뤄졌다. 얼차려 시간, 강도까지 모두 사전에 협의됐다. 대상은 성악과 06학번부터 08학번까지다. 이들은 전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고 집합했다. 얼차려를 준 쪽은 학생회장을 비롯해 졸업을 한 학기 앞둔 4학년 등 10여명이었다. 7시45분, 어느덧 30분이 흘렀다. 하지만 머리박기는 여전히 계속됐다. 신음소리를 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올린 손이 바닥을 짚는 등 자세가 흐트러지자 “똑바로 박아야지. 지금부터 손 내려가면 다 죽는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욕설과 함께 “3학년들이 선배들 무시하면서 후배들한테 할 말이 있냐. 요 몇 년 새 전통도 없고 기강도 없고 다 무너졌다”는 다그침도 들렸다.


8시, 급기야 신입생으로 보이는 몇몇 학생이 쓰러졌다. “머리가 아파서 못 하겠으면 정신력으로 버텨. 그 정도 깡도 없이 뭘 하겠냐”는 고함이 쓰러진 이들을 향해 꽂혔다. 신음소리가 더 많아졌고, 더 커졌다. “힘들다고 티 내냐, 아직 생각이 안 바뀐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박으면 그 생각도 없어질 것”이라며 다시 머리박기 자세를 강요했다. 8시15분, 1시간이 넘었지만 얼차려는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블라인드 문틈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한겨레’ 취재진은 결국 현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취재진을 발견한 한 학생이 저지하고 나섰다. 이 학생은 카메라를 뺏으려 하면서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취재진이 강의실 문을 열어 제치면서 얼차려는 끝이 났다. 취재진의 갑작스런 들이닥침에도 얼차려를 받던 적잖은 학생들은 부동자세를 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못했고, 일부는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온몸과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진리와 자유’를 교훈으로 하는 이 대학 성악과 학생들은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학생회 한 간부는 “(얼차려는) 올해 들어서는 처음”이라며 “지난주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대든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 11월 학교 차원에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당시 사건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며 “규율이 없으면 주역을 맡은 고학년 몇을 제외하고는 연습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김관동 연대 성악과 학과장은 “합창 등 대외행사를 해야 할 일이 많아 과 차원의 결속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며 “그래서인지 꽤 오랜 기간 얼차려가 있긴 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특별한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학기 초에 학생회장을 만나 학사지도는 교수가 할 테니 문제되는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을 했는데, 그 이상 지도가 안 된 것 같다. 이번 일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으로 시정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직도 대학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교수들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게 현실이다. 자신들이 편하기 때문에 모른 척 하는 것이지 결코 모를 일이 없다.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