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미국국토안보부가 운수노조와 대화하는 이유?

녹색세상 2008. 5. 21. 00:45
 

노동조합은 수없이 많은 협상을 한다. 종업원 5~10명을 둔 영세업체 사장님부터 수십만의 종사자를 거느린 다국적 기업, 사용자 단체는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등과 말이다. 운수노조는 최근 노동조합으로서는 아주 특이하게 미국 정부와도 협상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 교섭위원(협상단) 교육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할 것’, ‘조합원의 힘과 지혜에 의거할 것’이다. 노동조합과 국가의 경우가 꼭 같지는 않겠지만 그 기본 원리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와 국가 간 협상은 개인의 연봉협상이 아닌, 각 나라 구성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고 그것은 협상단의 협상기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가에 달려있다. 물론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독재국가야 이런 원리가 작동할 리 없고, 조합원의 요구에 무관심한 ‘어용노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입항저지 및 수송거부 불사’를 결정한 운수노조조합원들.


구성원의 동의 없는 협상은 구걸

 

우리는 미국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 협상단의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한심한 작태를 보게 된다. 먼저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지 않고 미국정부와 목축업자, 도축업자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의 힘과 지혜에 의거하지 않고, 정권이 바뀌자 모든 태도를 바꾸어 버리고 국민들의 몰이해를 탓한다. 그들은 무능할 뿐만  니라 오만하고 반성할 줄 모른다. 이것이 국민을 화나게 하는 것이다.  민의 저항이 드세 지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미국이 도와줘야’라며 구걸했고 미국 상무장관은 ‘재협상은 없다’며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어쨌든 국민적 저항에 밀려 오늘 ‘사실상의 재협상’이며 몇 가지 대책을 내놓겠지만 이것이 국민적 저항을 누그러트리지는 못할 것 같다.


운수노조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첫 날인 지난 2일 오전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으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입항저지 및 수송거부 불사'를 결정하고 이를 발표했다. 대단히 심각하고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6일 ‘오마이뉴스’에 이 결의의 의미와 배경에 대한 글이 실리면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월 2일 발표된 '건조한 성명서'에 비해 5월 6일치 기사 '우리 손으로 미친소를 운반하고 싶지 않다'는 그 결정과 집행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기에 네티즌들에게 주목받은 것 같다. 포털사이트와 대형 커뮤니티에 글이 퍼 날랐고 운수노조 홈페이지는 몇 시간 만에 지지 댓글로 다운되어 버렸다. 촛불집회에서는 ‘운수짱’이 연호되고 있다. 노동조합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 금속노조ㆍ전교조 등도 ‘미친소 수입저지’에 합세했고 민주노총은 ‘강력한 투쟁’을 결의했다.


산별노조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사회와의 소통


운수노조는 산별노조이다. 사내 복지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기업별 노조의 임금단체협상과 달리 초기업 단위노조인 산별노조는 사회적 지위에 주목하고 그 역할을 다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쇠고기 국면이 한국적 산별노조가 사회적 책임에 일정한 기여를 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사실 운수노조의 수송거부는 조합원들의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한다. 10%의 조직률에 불과한 운수노조 조합원들은 수송거부에 협조하겠지만, 그것 역시 TV에 출연한 한 쇠고기 수입업자의 비아냥처럼, ‘한 탕에 70만~80만원’ 하는 일거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는 것이다.(화물노동자들이 한 탕에 70만~80만원을 버는 것은 아니다. 이중 경유가 도로비 보험료 등을 제하면 손에 쥐는 것은 몇 만 원도 안 된다. 그것도 어음으로). 지도부의 구속수배도 감수해야 한다.


운수노조-미국토안전부 협상과 외교통상부의 한심한 작태


운수노조는 노동조합 조직으로서는 아주 특이하게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4월 13일 부산세관은 한미SFI(화물안보구상) 협약을 맺고 핵 및 방사능 물질에 대한 검색이 가능한 화물영상검색기를 부산 감만부두 허치슨터미널에 시범 설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남의 나라에 핵물질 검출을 위한 장치를 설치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우리 정부가 그 검색기를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화물차운전자들에게는 한 마디 양해도 없이 이미 협약을 맺어버렸다는 것이다. 운수조노는 즉각 반발했고 급기야 미 대사관과 미국 국토안보부 고위 관계자까지 노동조합과의 협의테이블에 나왔다.


노동조합은 화물영상검색기(RPM)의 안전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사용을 거부할 것을 분명히 했고 미국 관계자들은 250억원에 달하는 기계가 파손되면 자기들이 비용을 대서 고치고 방사선 피폭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등 노동조합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정작 그 협약을 체결한 당사자인 외교통상부는 아직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자기 구성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미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하는 마당에,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그게 무슨 문제인지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쇠고기 협상 역시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의 이해와 요구, 안전과 건강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와 고민도 없는 정부당국의 무책임한 작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그 핵심이라고 본다.


정부가 버린 주권과 자존심, 국민이 되찾아야


아무리 실리를 챙겨도 구성원의 자존심을 짓밟는 협상은 구걸이다. 하물며 명분도 실리도 없고 구성원의 동의라는 기본 절차도 없는 협상 결과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집단이라면 이미 집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노동조합에서 뒷구멍으로 회사와 협상해서 위원장이 도장을 찍어버리면 우리는 그 위원장을 바로 불신임해서 쫓아내 버린다. 그것도 못하는 노조는 어용노조이다. 쇠고기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미리 다 짜놓고 미국 측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는 굴욕적인 협상을 했다. 국가의 검역주권까지 몽땅 다 내주고는 그것을 국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자 국민의 몰이해와 배후론, 선동론을 뇌까리고 촛불집회에 대해 ‘청소년의 놀이문화가 부족해서’라는 한심한 인식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어용 집행부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이 어용은 아니다. 지혜롭고 힘 있는 국민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는 분명하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촛불문화제라는 지혜로운 방식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버린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자존심을 국민 스스로 되찾고 있기에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나라이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