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시작, 모퉁이 땅뙈기라도 경작하라
‘가능하면 뉴타운을 만들자.’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의 ‘돈벌기’이자 대변자인 정치가들, 그들의 재산축적도 그렇게 되었기에 ‘뉴타운’의 시작은 60년대부터 시작된 ‘이농’에서 도시민 철거, 여전히 철거민의 바람은 이어지고,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 다니는 유랑생활의 몫은 언제나 세입자들이며 가난한 우리들이다. 가난한 우리들은 공공주택을 빌려준다 하여도 또 언젠가는 밀려 밀려 어디론가 갈 짐을 꾸려야 할 것이다. 유랑생활의 끝을 누가 해줄 것도 아니고 식량을 찾아 떠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뉴타운을 외쳤던 정치가에게 사기꾼이 되지 않는, ‘뉴타운 공(空)약’이 되지 않는 길을 제안하고 싶다. 도심의 휘황한 불빛, 시멘트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 건물과 건물 사이는 길게 음지로 드리운다. 한 겨울 칼바람에 부는 날, 건물의 높이만큼 그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야 위로 솟았으니 양지를 맞을 것이고, 온풍기를 틀고 온도를 높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음지로 되어 눈이 오면 녹지 않고 바람이 더욱 세어 걷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추운 겨울이다. 걸어야 사람은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는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야 자동차로 오가는 일이니까. 무더운 여름날, 그 비싼 아파트 길목과 도심에는 실내 에어콘이 돌아가고 그 배출구는 길목으로 되어 무더움에 질식할 듯 한 공기를 흡입하는 자는 그 길목을 지나는 사람들일 게다. 역시 그곳에 사는 거주민들은 그 길목을 차로 드나들기에 ‘질식할 듯한 공기’와는 상관없는 일일 게다. 폐쇄된 공간, 그들만의 유쾌한 공간으로 인해 피해 받는 이들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팔아서 그들의 언저리에서 생활하는 그들보다 가난한 이들이다.
상상의 뉴타운을 한 번 생각해보자.
단층이면 좋겠지만 대도시에서 뉴타운은 단층이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오층 정도의 건물이면 1%라도 가능성이 있을까? 그것도 없다는 중소도시로 하든지 하자. 4인 가족 중심의 거주공간을 만들자. 몇 평이면 될까? 24평? 난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뻗어서 잘 공간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가구들로 메우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조그마한 수납공간이 있으면 되고, 가전제품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면 된다. 평수가 넓을수록 가구로 쓸데없는 장식소품으로 채우려는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욕구를 위해 돈은 계속 필요하고, 사람들이 운신하는 공간은 더욱 작아지기 때문이다. 텃밭도 있다. 요즘에는 분양조건 중에 하나가 녹지공간이다. 그러면 쓸데없는 정원수를 만들지 말고 텃밭공간을 한 가구에 10평씩 덤으로 딸려 분양하게 하자. 텃밭은 아파트 사람들이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쓸데없이 잔디를 깔지 말자.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그런 잔디는 쓸데없다. 본디 편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은 원두막으로 하든지 아니면 잔디를 깔더라도 농약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이 주저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
주차장은 없애자.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 단지 공용버스나 마을버스 등이 지나다니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 대신 자전거 주차장을 만든다. 여기에 사는 남녀노소는 자전거를 이용한다. 대중교통이 활발한 곳으로 자전거로 가면 되는 일이고 공용버스를 이용하면 될 일이다. 이곳은 태양열을 사용한다. 그러니 전력 소비량이 많으면 햇빛에너지도 감당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에너지 일정량을 사용하게 하고 그것을 초과하게 되면 그 달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 그 나머지 날은 촛불 켜고 살아야 한다.
몇 개월 익숙해지면 에너지 조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 놀이터보다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공용의 농장 숲을 만들자. 아이들을 위해 토끼장, 닭 공간이 있고 사이 나무들이 있다. 아이들이 식물과 동물이 함께 노는 공간이다. 그곳에다 나무 미끄럼틀이나 그네가 있어도 좋고, 널뛰기가 있어도 좋다. 이 도시에는 대형세탁기가 있는 공용 빨래장이 있다. 무겁고 덩치 큰 빨래를 하는 곳이다. 가벼운 빨래들은 모두 각자 집에서 손으로 해결한다. 그러니까 각 집에는 세탁기가 따로 없는 셈이다. 이곳에서 생활은 화학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냉장고는 중간 크기의 냉장고로 아예 건물을 만들 때 한정한다. 음식쓰레기는 되도록 나오지 않도록 한다. 음식쓰레기가 있으면 그것은 각자 공동퇴비장-미생물 발효장으로 가지고 나온다. 그러면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텃밭 퇴비를 이용하면 될 일이다. 요소에는 그 아파트 주민들이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있다. 구멍가게는 유해한 과자나 음료를 팔지 않는다. 최소한의 안전한 식품만을 취급한다. 구멍가게에는 재활용품을 두어 자신이 입지 않는 옷, 소품. 아이들의 장난감, 문고 등을 대여하거나 판매한다.
이곳에서는 가능하면 순환을 하도록 한다. 구멍가게에서 근무하는 조합원이 아파트 단지 거주 조합원의 콩나물도 기른다. 물론 집에서 있는 사람이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길러 먹다가 남은 것은 구멍가게에 두면 필요한 사람이 사갈 수 있도록 한다. 이곳에 상가란 구멍가게 중심의 생활권이 되는 것이다. 이 구멍가게는 조합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다. 아파트 거주 주부들의 몫일 수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알뜰한 삶을 살겠다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곳에는 이런 의식주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들어가면 된다. 이것이 새로운 도시문화다. 뉴타운은 신도시처럼 큰 도시가 아니라 블록형 마을 단위로 형성하면 된다.
상상인가 공상인가?
영국에서는 텃밭운동이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전통적인 뒷마당 정원들이,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마을 밖으로 밀려나가자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의 모퉁이를 비집고 들어가 로펭 드테레(땅뙈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공동 시민텃밭 채소밭에서 자뎅 우르리예(정원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클라인가르텐 (소규모 주말농장)이 있었다.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해 퇴근 후에 버려진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대여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1840년대 영국에서는 가장 높은 범죄율이 있는 곳에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시민텃밭을 도입하기도 했다. 지자체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시회도 열고 판매하기도 한다. 농사 과정 속에서 체득해나가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저항의 한 형태로서도 채소를 심는 일도 있다. 1649년 주위가 온통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에 분노한 사람들은 공유지를 점령하고 그곳에 채소를 심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경작하여 먹으면 국가는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 국가적 의료행위를 하는 셈이다.
즉 텃밭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국가에서 하는 것이 건강의료보험 제도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텃밭을 하면 다수확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토종종자를 보존하는 일도 할 수 있도록 한다. 기후온난화로부터 에너지문제와 식량, 유전자조작작물(GMO)에 대한 위협. 이 모든 연쇄부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길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이며, 기존의 도시에서 ‘경작’ 바람을 일으키는 일이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 맛있고 안전하며, 더없이 알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새로운 도시(마을)를 만들고, 지금 사는 곳에서 모든 것을 알뜰하게 사는 것. 그것은 기후온난화로부터 에너지, 식량 그리고 모든 위협들의 연쇄반응 속에서 우리를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만약 이런 뉴타운에 대한 상상이 실현되지 않더라고 지금 사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시작하는 온 몸의 저항이자 지금-여기에서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이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자식을 자신 외에는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변현단 / 연두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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