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국제

이방원의 조공도 알고 보면 ‘실용외교’

녹색세상 2008. 4. 25. 19:29
 

‘사대파’인 이방원도 공짜로 조공하진 않았다

 

 

‘대왕세종’에서 현실주의적 군주로 묘사되고 있는 태종 이방원. ‘자주파’인 도전의 요동수복론을 배척하고 당대 최강 명제국과 손을 잡은 ‘ 대파’이방원. 여진족 견제를 추진하는 명제국을 돕기 위해 조선산 군마까지 조공한 ‘사대파’가 이방원이다. 그렇지만 이방원은 대명(對明) 관계에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조선의 대명 종속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 군마 조공의 내용을 자세히 파헤쳐보면, 이방원이 사대를 하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종실록’ 태종 3년 4월 8일자를 보면, 조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공에 대해 반대급부가 수반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명나라 병부에서 조선 정부에 보낸 자문으로 상하관계 없는 기관 간에 교환된 공문이 실려 있다. 이 자문에서 명나라 병부는 군마 조공 문제에 관한 자국의 입장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지난번 사신인 태복시경 축맹헌 등이 단필 등을 싣고 조선국에 가서 말 1만필과 바꾸었습니다(該照先差太僕寺少卿祝孟獻等將運段匹等物前往朝鮮國易換馬一萬匹).”


이것을 보면 조선정부가 조공한 말에 대해 명나라 측에서는 비단이라는 반대급부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조공은 그냥 공짜로 바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공 그 자체가 경제적 손실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공이 물물교환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명확한 사례의 하나로서, 세종 임금 때에 행해진 여진족의 조선 조공을 들 수 있다. 형편이 어려운 여진족이 조선에 그냥 조공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반대급부를 기대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산 종이였다.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12월 27일자의 내용을 1보면, 예조판서 신상이 “여진족이 조공하러 올 때마다 종이를 요구한다”고 말하자 세종 임금이 “많이 주지는 말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이 주지 말라는 말은 너무 비싼 값을 치르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할 때에 대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와 같이 조공이 대가성 무역이라는 점이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상 일반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무(無)대가성 헌납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조공이 이처럼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이었기 때문에, 물산이 부족한 조선은 물산이 풍부한 명나라와 어떻게든 무역의 기회를 더 많이 갖고자 했다. 반대로 명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조공 횟수를 줄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조공보다는 그 반대급부인 회사(回賜)가 더 많은 것이 동아시아 사회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공을 받는 측은 대개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조공이 이처럼 무역의 형식이라면 조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랫사람이 선물을 바치면 윗사람이 답례를 한다는 형식으로 조공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의 개화파들 지식인들이 조공에 대한 거부감을 강력하게 표출한 것은 이 같은 조공의 형식적 측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조공은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늘리기 위한 무역의 일종이었다.


조선 ‘1년에 3번 조공하겠다’-명나라 ‘3년에 1번만 하지’


태종 이방원도 바로 그러한 경제적 목적에서 명나라에 조공을 했던 것이다. 태종이 대명관계에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려 했다는 점은 그가 명나라에 대한 조공횟수를 늘리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대외무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397년 이래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조공 횟수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국교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명나라는 ‘3년에 1번만 해라’고 한 데 대해 조선은 ‘1년에 3번은 해야겠다’고 맞서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 측의 요구를 1년 3사(使)라고 한다. 1년에 3번 사신을 보낸다는 것은 1년에 3번 무역단을 파견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이러한 조-명 양국의 신경전은 이방원이 집권한 해인 서기 1400년에 해결되었다. 결국 조선측의 요구대로 1년 3사로 확정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해마다 3차례에 걸쳐 정조사(正朝使)ㆍ동지사(冬至使)ㆍ성절사(聖節使)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공식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명회전’에 따르면 당시의 오키나와는 2년 1사, 베트남·태국은 3년 1사, 일본은 10년 1사였으니,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상당한 무역특혜를 입은 셈이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겠다고 나선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이 조선과 달리 중국 무역 기회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의 원인이 경제적인 이해관계임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17일 이명박 대통령의 만찬 테이블에 오른 ‘몬테나’산 소고기 요리. 미국 대통령 별장 숙식비를 이명은 너무 많이 지불하고 왔다.


머리 숙이고 돈 챙긴 이방원의 ‘실용외교’


이같이 사대파 이방원은 비록 요동수복의 기회는 날려버렸지만 적어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는 명나라에 머리를 숙이는 대신 그 명나라로부터 돈을 챙겼다. 만약 이방원이 살던 시대에 어떤 동아시아 나라의 군주가 명나라 황제의 별장에 가서 '고깃국' 한 그릇을 얻어먹는 대신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돌아갔다면, 이방원은 “저 친구는 나보다 한 수 아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 같다.


“저건 조공외교만도 못해. 나한테 한 수 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