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미술품은 재산 증식과 상속의 훌륭한 수단이었다. 비자금 사용처의 몸통일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특검은 삼성이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미술품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지난해 12월 박한철 삼성 특별수사ㆍ감찰본부(특본) 본부장은 검찰 수사를 특검에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만든 정황을 확보했다. 그 돈으로 이건희 회장 부인이 그림을 사는 등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도 확인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삼성 비자금으로 고가 해외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이 서울 한남동 조준웅 삼성특검팀 사무실에 출두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중요 비자금의 사용처 가운데 하나로 미술품 구입을 꼽았다. “홍라희씨는 그룹 비자금으로 수백억원대의 그림을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처럼 샀다. 2002년과 2003년 미술품 구입대금으로 해외 송금된 액수가 600억원대에 이른다. 하도 많이 사는 바람에 구조본의 걱정이 컸다. 결국 대검 중수부가 손을 댔는데 내가 직접 로비를 해서 서울지검에서 홍씨의 이름은 빼고 약식기소로 끝냈다.” 삼성이 미술품 구매에 열을 올린 것은 미술품이 재산 증식과 상속ㆍ증여에 안전한 맞춤 수단이기 때문이다.
세금이 없고 재산 내역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다. 특본의 한 수사 관계자는 “미술품은 재산 증식과 상속의 훌륭한 수단이다. 삼성의 미술품 구입은 비자금 조성 사건의 곁가지가 아니라 몸통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11월26일 김용철 변호사는 기자회견에서 홍씨가 90억원짜리 그림 ‘행복한 눈물’을 비자금으로 샀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삼성은 “홍라희 관장이 개인 돈으로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라고 했다가 바로 “마음에 들지 않아 구입하지 않고 서미갤러리에 돌려줬다”라고 말을 바꿨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사진:오마이뉴스)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는 특검에 나와 “홍라희씨에게 구입 여부를 결정하도록 4~5개월 정도 빌려줬다”라고 말했다. ‘행복한 눈물’이 홍송원 씨 소유라는 주장이다. 홍씨는 미국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에 그림 값을 치르지 못해 ‘행복한 눈물’을 담보로 잡혔다는 자료를 특검에 제출했다. 100억원 가까운 그림을 영세한 갤러리에서 먼저 산 뒤, 구매자를 물색했다는 해명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그림 값을 내지 못해 담보로 잡히는 일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고가의 그림을 갤러리에서 구입하고, 이를 몇 달 걸어두고서 구입하게 하는 방식은 미술계에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특검은 이 그림이 홍송원 씨 소유라고 결론 내렸다. 특검의 한 관계자는 “행복한 눈물이 홍라희 씨와 무관하다는 점이 거의 입증됐다”고 말했다. 이걸 수사라고 비싼 세금 들여가면 했는지 모르겠다.
‘미술품 수사’가 지지부진 했던 까닭
수백억원대 미술품 30개 가운데 ‘행복한 눈물’의 존재만 확인했을 뿐 ‘비자금 미술품’ 수사는 제자리걸음이다. 특검은 지난 1월 말 에버랜드 창고에서 무더기로 나온 그림 수천 점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 냈다고 한다. 창고에 있는 미술품 중 일부는 홍라희 씨 소유가 맞지만 모두 개인 돈으로 샀고, 삼성문화재단 측에 보관해달라고 맡겼다는 것이다. 미술품을 구입한 자금과 구입 시기, 통관 내역 등은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결국 특검은 홍라희 씨를 불기소하는 쪽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한 특검팀 관계자는 “김 변호사가 비자금으로 샀다는 그림 30점은 창고에 없었다. 미술품 구매 대금이 비자금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용철 변호사는 “특검의 책임 있는 분께 확보한 미술품 7500여 점이 누구 명의로 돼 있는지, 구입 자금이 삼성문화재단 예산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분께서 ‘그림의 바다에 빠질 수 없다’며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홍라희와 관련 여부는 사실을 제보한 김용철 변호사와 대질 수사를 하면 확인가능하다는 게 보편적인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특검은 대질 수사는 커녕 사실 관계확인 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로 조준웅 ‘삼성특검을 특검 해야’ 할 판이다. ‘그림의 바다’에 빠지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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