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특검이 사제들의 고뇌를 잠꼬대로 만들었지만

녹색세상 2008. 4. 18. 14:23
 

봄입니다. 그리고 아침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시 설레시는지요? 숲의 사람 소로우는 아침과 봄에 대하여 어떤 마음가짐을 일으키는지를 보고 사람 됨됨이를 가늠해볼 수 있겠다고 말했다지요. 아침을 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봄의 즐거움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당신 인생의 봄과 아침은 벌써 지나가버렸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오늘 봄날 아침을 찬미하시는 모든 벗님들께 공손한 인사를 올립니다.

 

▲지난 15일 오후 청주 금천동성당에서 만난 김인국 신부는 “우리 사회가 부패에 너무 관대하다”며 “그 실상을 직접 보는 게 가장 충격”이라고 말했다.



눈이 살아있는 나무, 몸살 않더라도 죽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느라고 한 참 바빴습니다. 성당 마당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자라던 나무들이 큰 놈은 큰 놈대로 작은 놈은 작은 대로 서로 어울리도록 모으기도 하고 떼어놓기도 하면서 새 자리를 정해주었습니다. 아주 늠름한 소나무 두 그루와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를 새로 구해서 심기도 했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는 색색의 철쭉을 꽉 차게 심어서 든든히 거느리게 해주었고 그윽한 향기의 수수꽃다리도 몇 군데 둥근 한 모둠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홍단풍을 짙푸른 섬잣나무들 사이에 세웠더니 불그스레한 얼굴이 더욱 빨개졌습니다. 오가는 이웃마다 동네가 푸르러졌다며 좋아합니다. 엊저녁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나무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아침마다 일찍 잠에서 깹니다. 아주 상쾌합니다.


그래도 낯설고 물선 땅에 뿌리를 내리자니 몸살을 앓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특히 수녀원 앞에 심은 소나무가 힘겨워합니다. 산에서 살다가 갑자기 도회지에 내려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볼 때마다 살아야 한다, 부디 살아남아야 한다고 자주 축복하지만 며칠 전부터 이파리가 시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저러다가 일 나겠다 싶어 조바심을 드러냈더니 늙은 조경사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신부님, 걱정 마세요. 잎이 좀 시들긴 했지만 눈이 살아 있잖아요!" 과연 그랬습니다. 눈이 살아있으면 당분간 몸살을 앓더라도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는 말에 저도 기분이 좋아졌고 그 순간 소나무도 대번 씩씩하게 보였습니다.


탄식과 연민…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살랑거리던 어제 오후 2시 삼성특검이 99일간의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자그마치 28억이나 되는 큰 돈을 들여서 얻었다는 결론에 대해 사람들이 소감을 물었습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모르겠네요.”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짧게 한 말씀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재촉하기에 탄식과 연민이라는 두 마디로 답했습니다. 탄식 그리고 연민! 조류인플루엔자 발생지역의 가금류를 땅에 묻듯 진실을 살(殺)처분하는 무시무시한 처사가 참담했고 한탄스러웠습니다. 파사현정의 당찬 기세로 시종일관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삶의 관성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돈의 가공할 위력과 묘한 맛에 압도되고 경도돼버린 영혼들의 초라함이 더 없이 불쌍해보였습니다. 탄식과 연민 그 외에는 지금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제단의 입장은 며칠 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벽 2시가 넘도록 저녁부터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토악질이라도 해서 뱉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지만 슬프고 심란해서 그런지 잘 되지 않습니다. 어제 노령의 조준웅 특검이 노익장이라도 과시하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장광설의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 다음과 같은 두 마디였더군요. 먼저 비자금 불법조성 의혹과 관련한 결론으로서 4조500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에 대하여 이건희 회장에게 물어본 결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조성한 합법 개인 재산이라고 함. 그리고 검찰 및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한 결론으로서 뇌물수수 의혹 당사자들에게 서면으로 질의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음이 판명되었으니 더 이상 의심의 번뇌에서 벗어나시기 바람. 이상! 


혐의자에게 여쭤보고 받아 적는 특검…진실은 어디 갔나요?


다른 게 아니라 비자금의 조성경위와 비자금의 용처를 밝히는 것이 특검의 임무였습니다. 수조원대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한 불법적인 경위를 밝히고, 그렇게 만든 검은 돈을 마구 뿌려서 국가 운영시스템을 교란하고 국가 주요 인사들을 매수하여 감찰기관들의 기능을 불능화한 현실을 밝혀내라고 만들어준 특별검사였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 일이라곤 불법과 위법의 당자들에게 ‘여쭤보고 그대로 받아적는 그것’뿐이었으니 이런 게으름은 무능의 탓일까요 교만의 탓일까요? 그러면서도 이건희 일가의 거악과 함께 자신을 고발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적 목숨을 포기해버린 김용철 변호사의 의미 있는 증언 일체에 대해서는 별 신빙성도 증거력도 없는 오락가락하는 소리 정도로 찌그러뜨리고 망가뜨렸습니다. 이제 검찰에 넘길 의혹은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며 특검은 위풍당당이고, 검찰은 검찰대로 넘겨받을 삼성 수사는 더 이상 없다고 호언합니다. 도대체 모두가 목말라하던 진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지금 제 앞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유서처럼 작성한 고백문이 놓여 있습니다. 벌써 수차례 읽었던 이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신부님께 올립니다. 이 글이 유서가 될 수도 있음을 절감하며 이제 되찾고 싶은 제 양심에 비추어 아무런 부끄럼 없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만 저로 인하여 상처받을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미안할 뿐입니다.” 특검은 생을 바쳐 일군 모든 성취와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해가면서 우리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 소중한 고백운동에 나선 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신뢰한 사제들의 고뇌를 불온한 잠꼬대로 무시해버렸습니다. 변호사의 고백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제 제가 받을 벌을 회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스스로 검찰에 자진출석하여 자수하고 처벌을 받는 것도 감수할 것입니다. 다만 이 일이 제대로 밝혀져 삼성도 제 기능을 찾고 국가기관들도 염결성을 회복하며 제 자신 또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의 바람이 없습니다. 이제 신부님께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나니 홀가분함을 넘어 황홀한 행복감까지 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임을 느낍니다. 신부님! 유약한 저를 한없이 꾸짖으시고 도와주십시오.”


제 기도는 이제 한 가지입니다‘ 밤이 깊어 새벽이 가깝고 저는 너무 지쳤습니다. 이제 잠자리에 드는 사제의 기도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츠베타예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저 기괴한 소리들을 잠든 동안 혹시라도 이해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비는 그런 기도 하나 뿐입니다. 잎이야 말라도 눈만 살아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일러준 늙은 일꾼의 말을 되새김질 하면서 늦은 잠자리에 듭니다. 캄캄한 밤이지만 그래서 선명해진 별자리를 바라보는 나무의 눈들이야 한결 빛나겠지요. (김인국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