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폭행사건 피해자는 왜 학교에 가지 못했나

녹색세상 2008. 4. 15. 18:04
 

찰 싹!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깼다. 갑자기 뺨을 맞은 대학교 1학년 김보경(여)씨는 벽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정신이 혼미했다. 안경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귀가 이상했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다. 김씨는 비명을 질렀고, 놀란 선배와 동기들이 달려 나왔다. 최근 논란이 된 대학 체육부 구타 사건이 아니다. 예술전문인을 양성한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미술과(한 학년 정원 15명 내외)에서 지난해 6월 9일 새벽 3시 30분께 벌어진 일이다. 김씨를 때린 사람은 같은 과 1년 남자 선배인 박철수(당시 27세)씨 였다.

 

 

 

새내기 김씨는 왜 선배에게 맞았나?


이날 김보경씨는 동기들과 함께 수작업으로 해외에 출품할 전시회 팸플릿을 만드는 중이었다. 새벽 3시경 같은 과 선배 3학년 ㅅ씨와 2학년 박철수씨가 작업실로 들어왔고, 곧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 중 선배들이 1학년들의 팸플릿 작업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이를 들은 김보경 씨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를 들은 선배 박철수씨는 “지랄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며 김씨 의견을 묵살했다. 동기들이 다 있는 앞에서 폭언을 들은 김씨는 심한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3학년 ㅅ씨는 “너희들을 믿어보겠다,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말하고 회의를 마쳤다.


잠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 화를 억누르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던 김보경 씨에게 박철수씨가 다가왔다. 그리고 김씨의 머리, 어깨, 목덜미를 만지며 “화났냐. 나도 힘들어. 화풀어”라고 말했다. 김씨와 동기들의 말에 따르면 박씨는 평소에도 여자 후배들에게 불편한 신체적 접촉을 자주했고 김씨가 이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힌 적도 있다고 한다. 박씨가 계속해서 ‘기분 나빴냐’고 묻자 김씨는 “그런 상황에서 기분 안 나쁠 사람이 어디 있냐”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박씨의 신체 접촉이 계속되자 화가 난 김씨는 “정말 이러지 마세요”라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박씨는 교실을 나갔고, 잠시 후 김보경 씨를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김보경 씨가 불려간 3층 자판기 앞. 캄캄한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씨가 김씨에게 ‘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넌 내가 선배로 안 보이냐, 넌 네가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대로 행동 하냐”고 말했다. 김씨는 너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4학년 선배가 커피를 뽑으러 왔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 후에도 박씨의 질문은 계속됐다. 이 모든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던 김씨는 박씨가 “대답하기 싫으냐”라고 묻자 ‘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박철수씨의 손이 날아왔다. 충격에 쓰러진 김보경 씨는 귀가 너무 아파 그날 오후 병원에 갔고, ‘좌측 고막 외상성 천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건 다음날인 10일, 무대미술과 교수가 1학년 교실로 와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지만 김보경 씨는 그 후 학교에서 박철수씨에게 정확히 어떤 처벌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로부터 어떠한 통보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2학기 개강 첫 날, 김보경씨는 소문을 통해 무기정학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던 박철수씨를 학교에서 다시 마주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폭력 가해자, 방학 동안만 정학처분 받아


김보경 씨가 학교 측에 요청해 얻은 자료에 따르면, 가해자인 박철수씨는 지난해 6월 20일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성북노인종합복지관 식당에서 총 22시간의 사회봉사활동(급식 및 배식)을 이행했다. 그런데 이 무기정학이 같은해인 2007년 9월 3일(개강일) 해제된 것이다. 김씨는 "방학 때는 원래 학교에 안 나오는데 여름방학기간 동안 정학을 받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의 같은과 동기들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는 공동 작업이 많아 선후배끼리 서로 부딪칠 일이 많다. 하지만 김보경씨는 두 번 다시 박철수씨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박씨를 보게 되는 날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고,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공포감과 수치심 때문이었다.


박철수씨를 마주치는 일이 악몽과 같았던 김보경 씨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고, 결국 2007년 2학기 학사 경고를 받아야 했다. 가해자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닌 반면, 피해자는 혼자 가슴앓이를 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박철수씨는 올해 3월 무대미술과 학회장으로 선출됐다. 박철수 씨의 징계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에 대해 ‘연극원 징계위원회’ 위원이었던 ㅇ교수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해서 “그럼 퇴학을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이냐, 1~2년의 정학 처분은 학생에게 너무 가혹하다”며 “위원회 내에서 가해자에 대해 1년 정학 처분을 내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와 함께 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성폭행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졸업할 때까지 가해자를 학교에 다닐 수 없게 했다. 이에 대해 징계위원회 ㅇ교수는 “성폭행 사건의 경우, 징계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성폭력 상담소의 권고를 가해자가 받아들인 것”이라며 “정식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려 처벌을 받은 이 사건과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후배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철수씨가 학회장에 뽑힌 것에 대해 그는 “학생들이 학회장을 뽑은 것에 대해 교수가 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1학년은 아메바’…강압적인 위계질서


그렇다면 폭력의 가해자인 박철수씨는 어떻게 학회장이 될 수 있었을까? 공동 작업이 많은 무대미술과의 특징 때문에 한국종합예술종합학교에서도 이 과는 유독 위계질서가 강하다는 게 피해자 김보경 씨와 과 친구들의 설명이다. 무대미술과의 한 교수는 ‘1학년은 아메바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뿐 아니라, 지난해 졸업 작품 전시회 관련 회의에서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선배 말에 토 달지 마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후배가 선배 의견에 다른 의견을 제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 때문에 선배들뿐만 아니라 김보경 씨와 같은 학번 동기들 중에서도 김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철수씨 역시 “내가 폭력을 행사한 것은 정말 잘못했지만, 김씨의 의사표현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며 “(김보경씨의) 버릇없는 행동을 혼내주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말했다. 불편한 신체적 접촉에 대해서도 박씨는 “단지 선배가 후배를 달래주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이는 친밀감의 표시일 뿐, 신체적 접촉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보경 씨는 “회의 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불편한 신체적 접촉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해 했다. 사건 발생한 지난해 6월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김보경 씨는 충격으로 멍하니 눈물만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교 측의 처벌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사건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학내에서 고립될 수도 있어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상처를 감추고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인도로 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러다 올해 김보경 씨는 TV에서 용인대 신입생이 선배에서 폭행당해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생각을 바꿨다. 사건 발생 9개월만이다. 이번 학기,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김보경 씨는 어려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학교 측의 부적절한 처벌과 무대미술과 내에 만연해 있는 군대식 문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다. 김씨의 사연을 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 10여 명은 지난 4월 11일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오마이뉴스/홍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