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보니 진보정당이 집권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며 그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2010년 지방선거를 첫 번째 목표로 바라보고 싶다. 지역 시민사회의 상대적 취약성과 젊고 열정적으로 일할 만한 활동가층이 얇은 이유로 현재로선 정체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지역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새 학기이고 등록금 인상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으나, 4월을 지나지 못해 가라앉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조상들도 이미 고려 시대부터 국립대학 성균관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무상 대학교육을 실시했다”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는 노회찬 상임공동대표
대운하 건설과 지방대 무상교육
그렇다면 우리는 총선이라는 당면 과제에 대응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민중의 이해를 정확히 대변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지방대 무상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민해 보자. 첫째는 대학평준화와 관련해서, 둘째는 지방인재 육성과 지방경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대학문제와 관련하여 현재 나온 방안들이 서너 가지 정도 있는 것으로 안다. 등록금 후불제와 등록금 차등책정제, 그리고 등록금 상한제, 법인세를 통한 등록금 무상화. 개인적으로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하나 각각의 맹점이 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추구하는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볼 때 등록금 후불제는 당장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수많은 학생들이 빚을 떠안음으로써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대학 등록금 지불을 연기하거나 유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의 부담은 덜더라도 후불제를 핑계로 한 등록금 인상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등록금 차등책정제는 먼저 학생들마다 소득을 심사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제도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서울대가 시행하는 지역할당제를 보자.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이득이었는가? 대학 등록금 상한제 역시 대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얼마나 가능한가에 따라 결정될 것인데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공통적으로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인세는 연 10조원의 재원확보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책들은 과연 언제 실행 가능한가? 내가 보기엔 부유세가 더 현실적인 방안인 것 같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재정확대가 필수 조건이다.
재정확대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큰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가 경험한 정부는 적어도 교육에 관해서만큼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였으며 정부에 대한 불신과 증세에 대한 불만, 작은 정부에 길들여진 서민들이 재정확대를 전제로 한 이러한 정책에 쉽사리 동의할 것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교육에 있어서 입시제도와 대학서열화를 폐지해야 할 필요성까지 있는 마당에 이것에 대한 각각의 정책을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걸 보고 국민들이 그냥 알아서 표를 몰아줄 거라 생각하시는가?
우리는 입시철폐와 무상교육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정책은 바로 지방대 무상교육이 될 것이다. 일단 먼저 조건을 달아두자. 이것은 한시적으로 지방4년제(공사립대 포함. 교대, 산업대, 전문대 제외) 대학생 약 82만 명을 입학부터 졸업까지 4년간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무상지원이 적용되는 첫해 신입생부터 적용을 하여 그 후 4년째 되는 해 들어오는 신입생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지원한다. 이렇게 하면 사업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총 7년의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더 있는데 첫째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1/3로 낮추는 것이며 둘째는 공사립대 상관없이 모든 등록금을 감면해 주는 것이다. 왜 이런 방안을 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대학평준화를 주장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속칭 일류대와 정면 승부를 벌여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게 현실적인 여건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입시폐지의 대학평준화 운동을 보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정체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대중에게 당장 피부로 와 닿지 않은 결과다. 따라서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다. 현재 지방 국립대가 지방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이유, 서울 소재 대학과 미약하나마 경쟁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저렴한 등록금에 있다. 만약 지방에 있는 4년제 대학만이라도 등록금의 일정 비율을 무상화한다면 서울 소재 대학과 어느 정도 경쟁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무상화 자체만으로도 지방대학의 평준화가 가능할 것이다. 즉 큰 목표를 잡되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후방을 먼저 공략하고 외각을 먼저 치는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방대 무상화에 필요한 재원과 기간
그렇다면 앞서 전제를 바탕으로 지방 4년제 무상화에 필요한 재원은 어느 정도일까? 먼저 등록금을 1/3로 낮추는 방안을 생각해보자. 사립대의 경우 4년간 3300만 원 가량의 등록금이 소요되며 국공립대는 이보다 훨씬 낮은 1400만 원 정도이다. 공사립대를 포함한 지방대 학생의 수는 82만 명 가량이며 이에 따라 계산을 해보면 약 15~16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수치라고 본다. 왜냐면 현재의 경부운하 건설비용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지방대 완전 무상화를 전제로 한 재원은 약 22조 원인데 이것 역시 1996년에 세종연구원에서 제시한 경부운하 건설비용과 같다.
△우리 젊은이들을 더 이상 절망의 늪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등하지는 않다 해도 기회가 같이 주어지는 ‘형평성의 원칙’은 주어져야 한다.
4월이면 등록금 투쟁도 끝날 것이며 이러한 정책들도 총선이 끝남과 함께 그 시한부 생명을 끝낼 것이다. 그러나 총선 이후로도 대학교육과 등록금 문제는 지속적으로 거론해야 하며 입시와 대학서열화 문제 역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대운하를 막아야 하며 동시에 지방서민의 생활을 안정화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방대를 무상화한다면 우리가 굳이 계층과 소득을 구분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서민들의 선택은 결국 지방대가 될 것이다.
예비군 제도 폐지론 점화를 위한 조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방대가 서울 소재 대학에 대하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민이라는 계급ㆍ계층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무상교육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지방대 무상화 정책을 반드시 추진할 필요가 있다. 88만원세대인 20대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예비군 제도의 폐지 역시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시키지 않으면 안 되리라 본다. 모병제로 전환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며 진보진영 내의 여러 의견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굳이 모병제로 가지 않고 복무기간을 독일, 프랑스처럼 축소하고 징병제의 틀을 유지하는 현 상태에서 대체복무제를 폭넓게 허용하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면 모병관들이 슬럼가에 들어가 빈곤층을 상대로 군대에 들어오라 설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이툰 부대에 지원한 병사들이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며 위험을 감수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군복무를 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과연 모병제는 우리가 지향할만한 군제개혁의 모습일까? 국가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와 살인행위에 동원되는 건 결국 ‘빈곤층과 서민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비군 제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폐지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며 사실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군사독재정권 시절부터 기되어 왔다. 군대는 국방의무의 수행이라는 명분을 붙일 수 있겠으나 예비군은 말이 훈련이지 실상은 강제동원이 아닌가.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는 모든 장병들은 88만원 세대이며, 그들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그들의 헌신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 병역을 끝마친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세대에게 예비군 훈련이라는 또 다른 역(役)을 부과함으로써 이중의 부담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예비군 제도의 폐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임을 설명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예비군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둘째는 88만원 세대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예비군제도 폐지 정책 발표로. 만약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고 이슈화한다면 우리는 보수정당과 차별화를 시도할 수 있으며 서민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진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정당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훈련 때 가서 같이 교육받는 분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봐도 열에 아홉은 예비군 훈련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왕안석의 과거 폐지론과 학교교육을 통한 인재육성
그들이 왜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중의 의무를 부담하면서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당해야 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비군 제도 폐지를 88만원세대 권리 찾기의 출발점으로 만들어보자. 송(宋)대의 개혁가 왕안석(王安石)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으면서, 그가 추진한 사회 시스템의 개혁(新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왕안석에게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려 1천년 전에 과거제도의 폐해를 비판하고 삼사법(三舍法)이라고 하여 현학(縣學)→주학(州學)→태학(太學)으로 이어지는 학교교육체계를 마련한 후 궁극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하려고 했던 그의 마인드 때문이다. 송-명-청까지 이어지며 전근대사회를 지탱한 과거(科擧)는 한국의 지옥 같은 입시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과거를 보기 위해서 외워야 했던 글자는 65만 자에 달했으며 그렇게 해서 합격해 관리가 되어도 ‘천하국가(天下國家)를 위해 어떠한 도움 되는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왕안석은 황제에게 바치는 만언서(萬言書-上仁宗皇帝言事書)를 통해 말했다.
우리가 진보정당을 만들 생각인가, 아니면 총선을 위한 일회용 정당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을 하는 이상 총선에 대응하는 것은 그 시기가 설령 늦다 하더라도 나서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장기적으로 진보정당의 집권을 바라본다면 시기가 늦고 빠르고를 떠나서 우리의 계급적 지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정책도 그에 따라 연구하고 발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과연 이명박 정부에 대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내놓은 정책 대부분은 재정지출의 확대를 전제로 한 것들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재정수입, 즉 세금을 확보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의 정책은 매우 훌륭했다.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망했다고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국민들은 우리를 찍을 생각이 없다. 당장에 실현할 수가 없는, 적어도 부유세 신설이 우선되어야 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좋지만 매우 느리고 장기적이며 피부에 와 닿지가 않는다. 최근 대학평준화운동본부의 침체를 바라보며 왜 이것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운동으로 그치는지 생각해봤다. 결론은 답이 그게 아니라는 거다.
거대 기득권과 정면 승부를 할 것인가 외곽을 먼저 허물어뜨릴 것인가. 이제는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지방대 무상화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방 서민들의 지지를 얻고 그 안에서 진보정당을 이끌어갈 젊은 인재 풀(pool)을 구성해야 한다.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후방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왕안석은 젊고 개혁의 열정에 불타는 신종(神宗)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5년간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그것은 신종 이전의 황제들인 인종(仁宗)에서 영종(英宗)까지 2대를 거치는 동안 그가 지방관으로 종사하며 실험했던 정책들이고 일정 부분을 성취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그의 실패는 절대적으로 인재의 부족이 원인이었다고 본다. 왕안석은 항상 인재 부족을 호소했다. 친구인 사마광을 비롯한 유능한 보수파 관료들은 그를 돕지 않았으며 그의 정책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불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당시 토지를 겸병한 대지주와 대상인 등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한 것이었다. 또한 그를 뒷받침해야 할 추종자들은 출세와 권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만한 마인드를 가진 인재가 왕안석의 주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진보정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의 육성
그가 황제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의 지방관 재직을 통해 경험을 쌓고 개혁의 역량을 키워 왔던 것이다. 지방을 중심으로 잡고 지방대 무상화를 우선 추진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인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깨어있는 많은 젊은 인재들이다. 진보정당은 겉으로는 학벌 폐지를 말하지만 소수의 학벌 엘리트가 주도하여 당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학벌 폐지를 부르짖기에 앞서 그에 대한 방안을 먼저 고민했으면 한다. 그리고 88만원 세대는 20대를 지칭하지만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소외된 20~30대를 망라한 젊은 계층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봐야 할 것이다. 정책을 내더라도 20대 정책 따로, 교육정책 따로, 등록금 문제 따로, 청년실업 따로, 비정규직 따로, 이렇게 따로 국밥으로 얘기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세트메뉴 모르나? 즉 전체를 관통할 만한 두 세 가지 주요 정책으로 압축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나머지를 부수적인 정책으로 분류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슈퍼마켓처럼 이런 저런 보기 좋은 정책을 나열한다고 해서 정책정당이 되는 건 아니다. 단순히 몇 가지 정책만으로 88만원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고 대중운동과 함께 나아가야 하며 그러한 동력을 추동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야 정확한 맥을 짚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멀고 험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루쉰의 말처럼, 희망이란 지상의 길과도 같이 본래는 없었으나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길이 된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도 같은 가지 않은 곳을 가며 더 많은 사람이 그곳을 통행할 수 있도록 닦아야 한다. (레디앙/정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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